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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25회 부산독립영화제
일시 l 2023. 11. 16. ~ 11. 20.
장소 l 영화의전당, BNK부산은행 아트시네마 모퉁이극장, 무사이 극장
개막작
김밥이에요! It’s Gimbap!
극영화┃컬러┃13분|2023
DIRECTOR 이강욱
손님 하나 없는 김밥집에 삐삐가 나타났다.
프로그램 노트 인정한다. 산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고달프다는 것을. 우리는 내 마음과 같지 않은 일과 사람 앞에서 포기하거나 냉소를 보내기가 쉽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씩씩하게 전진하는 태도는 언제나 더 어려운 법이다. 이강욱은 <아듀, 오맹달>(2021)에 이어 <김밥이에요!>에서도 역시 판타지와 유머, 장르를 통과해 그런 세계를 구현하려 애쓴다. 이번에는 말괄량이 삐삐가 김밥가게에 나타나서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한바탕 흔들고 지나간다. 어른이 된 우리는 삶과 현실이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해도 사람을 살게 하는 건 그런 순간들이다. 그러니 이강욱의 인물은 삶과 현실에 지칠 순 있지만 결코 가엾지 않고, 상황이 나쁘더라도 구차하지는 않다. 서툰 솜씨로 만든 티가 역력하고 그걸 애써 숨길 생각이 없는 영화의 효과와 미술도 마찬가지다. 환영성을 무시하며 뻔뻔스럽게 건네오는 재치와 익살, 그 기저에 흐르는 천진한 감성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동요를 일으킨다. (김지연) |
시월 October
다큐멘터리 | 혼합 | 30분|2023
DIRECTOR 장예림
나의 고향, 여수와 부산. 두 곳엔 기억과 망각 속 반복된 시월이 스며있다. 결코 우연이 아닌 시월은 그렇게 울긋불긋 물들었다.
프로그램 노트 1948년 여수와 1979년 부산은 얼마나 멀리 있으며, 또 얼마나 가까울까. 한국 근현대사에서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1979년 10월 부마항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각자의 이유로 상대적 조명을 덜 받았다. 영화는 ‘나의 고향 여수와 부산’이라는 자막을 띄우며 서막을 연다. 감독은 사적 기억으로 두 공간의 장소성을 세밀히 들여다본다. 유령처럼 도처를 떠도는 카메라는 과거의 상흔이 아로새겨진 장소들의 현재와 마주한다. 그 곳은 어느새 관광지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과거의 상징성은 사라진 채 자리 잡고 있다. 그 장소성을 토대로 <시월>은 끊임없이 망각에 저항한다. 단단한 결기 속 흑백 화면의 장소들은 잠시 멈추거나 느려지거나, 우회하며 인간의 기억을 형상화한다. 환원되지 않음을 구체화한 사운드 디자인, 에세이적인 작법으로 다가가는 감독만의 이정표를 따라가 만나게 되는 놀라움을 경험해보시길. (이동윤) |
배우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싶으세요? who's the actor?
극영화┃혼합┃28분|2023
DIRECTOR 박천현
배우인 길호와 민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역할을 정해 매달 유튜브 영상으로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배우인 유정과 세완을 만나게 되고 길호는 둘 사이에서 각각 다른 연기를 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선택을 안 해, 선택을!”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물체들, 푸념 섞인 목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화면이 이내 밝히는 곳은 어느 오디션 장이다. 자신을 향한 관계자들의 무관심, 그로부터 오는 모멸감을 견디며 준비한 연기를 이어나가는 배우의 얼굴은 결국 평정심을 잃고 일그러져간다. 이는 배우인 길호(전두식)가 동료와 함께 기획하고 연기하며 만든 영화의 한 장면임이 곧 드러난다. 직접 만든 영화 안에서 길호가 맡은 배역은 연기하는 사람, 배우다.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모니터를 통해 바라볼 시간을 갖게 되는 길호.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듯 하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는 일은 배우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보겠다는 투지로 시작했을 행위가 거듭될수록 길호는 본연의 자신과 가상의 배역의 경계에 놓이는 경험을 한다. 길호가 연기한 인물은 누구일까? 답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거기에 다만 우리는 모든 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부 다 알지 못하면서도 매 순간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남영) |
폐막작
살이 살을 먹는다 Laid-back Town 극영화 | 컬러 | 29분|2023 DIRECTOR 전소영 지와는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 잠만 잔다. 잠에서 깬 지와는 예전에 함께 사업을 함께 하기로 한 민식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프로그램 노트 어느 시골마을. 낡은 집 안에서 잠을 자는 ‘지와’(유영우)와 일기를 쓰는 그녀의 언니 ‘공가’(나애진).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겨울바람 소리와 은은한 조명. 영화의 첫 도입부이다. 잠만 자는 정적인 모습인 지와와 일기를 쓰며 삶은 계란을 먹는 상대적으로 동적인 공가의 모습에서 둘의 온도차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또한 곰팡이가 핀 벽지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을 벗어나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곰팡이가 끊임없이 피지만 매번 벽지를 갈아야 하는 공가와 벽지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지와. 그렇다. 공가는 자신의 터전에서 계속 살아가려는 인물이고 지와는 그곳을 떠나려는 인물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모습뿐만 아니라 마을에 살아가는 다른 중장년층들의 모습 그리고 외지인 ‘민식’도 비중 있게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어디론가 떠난다기보다 정착을 해서 살아가는 인물로 비친다. 각자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생각을 병렬시켜 보여주고 옳고 그름이 아닌 각자만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느껴진다. 남아있던, 떠나던 그들 각자만의 고민과 삶의 방식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선택을 응원한다. (김민근) |
수상결과
| 시상내역 | 수상작 |
| 대상 | <살이 살을 먹는다> (2023) 전소영 |
심사위원특별상 | <누룩의 시간> (2023) 박민경 |
| <해야 할 일> (2023) 박홍준 | |
| 최우수연기상 | <해야 할 일> (2023) 김도영 |
| 기술창의상 | <시월> (2023) 장예림 |
| 관객심사단상 | <살이 살을 먹는다> (2023) 전소영 |
제25회 부산독립영화제 포스터

제25회 부산독립영화제 트레일러
메이드 인 부산
[경쟁1]
망치와 짱돌 Crack to Egg
극영화 | 혼합 | 26분|2022
DIRECTOR 김경현
신인 영화감독 예림은 아는 선배의 독립극장 폐관 상영회에 초청된다. 그런데 예림의 전 남자친구이자 배우인 문수가 극장에 찾아온다. 다시 잘 해보려는 속셈인지 예림에게 베실베실 웃으며 접근하는 문수. 급기야 예림의 GV까지 출연배우로서 참석하게 되고, 예림은 불안한 마음으로 과거에 문수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던 순간을 떠올리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문수에게 끌려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의 예림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주인공 예림(박은진)은 자신의 첫 연출작 상영회에 참석한다. 상영회에서 그녀는 전 남자친구이자 자신의 영화 주인공인 문수(서현우)와 마주하게 된다. 불편한 기색을 하며 그를 피하려는 예림과는 달리 문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건다. 마침 영화상영이 시작되고 그와 동시에 둘의 과거 장면이 교차한다. 이후 GV에서도 그녀의 과거가 파편적으로 개입되는데 문수의 현재와 과거의 모습은 대비되어 보이지만 그에게 이끌려 다니며 주체적이지 못한 예림의 모습은 과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점차 GV가 진행되고 극이 진행될수록 예림의 감정은 고조되고 그녀 안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감독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현재와 과거, 주인공과 영화를 배치시켜가며 플롯을 확장해나간다. 이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에 동요를 일으키고 캐릭터를 변화시키며 그녀의 인생에 하나의 변곡점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감독은 인물이 변화와 성장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또한 이 영화의 가장 킬링 포인트인 비호감인 캐릭터 문수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예림의 모습을 보면 시원한 통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민근) |
A Day in Fukuoka
다큐멘터리 | 컬러 | 41분|2023
DIRECTOR 전찬영
한국을 떠나 후쿠오카에 정착한 5명의 여성이 있다. ‘부산정’라는 삼겹살 전문점을 운영하는 김영신, ‘마당쇠’라는 돼지갈비 전문점을 운영하는 오정화와 그녀의 어머니 김분순, ‘라포르’라는 에스테틱 샵을 운영하는 오정화, 코코시스 리조트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는 양이레. 한국을 떠나 후쿠오카에서 정착하는 과정과 자신의 사업을 꾸려가는 과정을 따라가 본다.
프로그램 노트 전찬영 감독하면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유려하게 풀어내는 <바보 아빠>(2015), <집 속의 집 속의 집>(2017) 등의 작품이 먼저 떠오른다. 천연덕스럽게 가족의 이야기를 풀었던 감독은 종국에는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의 굴레와 가부장제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런 감독이 로 가족을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간다. 이 작품은 마치 <다섯 번째 방>에서 방을 찾아 헤매던 엄마‘들’의 확장된 세계를 엿보는 듯해서 인상적이다. 다큐 속 한국을 떠나 후쿠오카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보면 그녀들은 엄마이면서 동시에 가족을 벗어나 한 명의 노동자로 자신의 자리를 찾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그녀들의 경건한 노동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어진다. (김필남) |
심판 Judgement
극영화|컬러|16분|2022
DIRECTOR 서한솔
교내에서 학우들에게 담배를 팔며 생계를 이어가던 건우(18). 교내 재판장에 피고인으로 서게 된다. 검사로 건우를 처벌하게 된 나연(18). 나연은 건우가 평소 불성실한 학생이라는 점과 이번 일을 연관 지어 유기정학을 내리려 한다. 그러기 위해, 건우에 대한 증거가 더 필요한 상황. 나연은 건우를 뒤따라가다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교내 모의재판에서 검사를 맡은 나연(최하영)은 담배를 팔아 용돈을 마련하는 건우(양범수)를 몰래 찍어 재판에 회부한다. 격분한 건우는 재판에 불참하고, 추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그의 뒤를 밟는 나연은 이내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한다. <심판>은 뛰어난 장르적 세공술을 갖췄다. 각종 장치가 포진 된 각본은 뒤이어질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고, 과감한 촬영술은 극적 효과를 배가한다. 이를 바탕으로 최초 설정한 질문을 정당한 자리에서 회수한다. 더불어 이를 이행하는 배우 4명의 합이 놀랍다. 이들의 궤적은 대립과 평행을 오가며 장면의 밀도를 채운다. 아마 이번 영화제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오버 더 숄더 샷(O.S)이 등장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엄격한 도덕률을 주장하는 한 인간의 아이러니다. (이동윤) |
[경쟁2]
슈퍼히어로 Superhero
극영화 | 컬러 | 19분|2023
DIRECTOR 박범진
야구선수를 꿈꾸는 초등학생 ‘범’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과의 야구 경기에서 빈번히 패한다. 복수를 꿈꾸던 그때, 자신의 롤 모델인 최동원 선수가 눈앞에 나타난다.
프로그램 노트 명품 투수를 꿈꾸는 꼬마 범(김예겸)은 오늘도 동네 패거리에게 홈런을 두들겨 맞고 싸인볼을 뺏긴다. 패거리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눈앞에 콜라 캔도 맞추지 못하는 눈물 나는 제구력이다. 이런 그에게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레전드 최동원(권해원)이 눈 앞에 나타난다. 아무렇지 않게 저녁을 먹은 최동원은 범과 함께 명품 투수가 되기 위한 지옥 특훈을 실시한다. 박범진 감독은 전작 <약구르트>(2022)와 마찬가지로 야구하는 꼬마를 등장시킨다. <약구르트>가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스윙 연습인 반면 <슈퍼히어로>의 투구 연습은 보다 삶에 가깝다. 최동원의 ‘함 해보입시다’ 정신이 유쾌하고 키치적인 연출로 영화 내내 다가오고, 주인공의 고군분투에 어느새 열띤 응원을 보내게 한다. 싫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연출자의 능력 중 하나라면 <슈퍼히어로>는 그 최전선에 머무른다. 무엇보다 최동원이 환생한 줄 알았다. (이동윤) |
파도에 맞서 Against the Tides
다큐멘터리|컬러|15분|2023
DIRECTOR 최준서
준서, 윤아, 준우는 청춘이라면 무조건 떠올리는, 진부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동해안 종주를 소재로 자전거 여행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한다. 출발 전까지 이 여정으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달리기 시작한다. 목표 없는 소모적인 페달 밟기는 그들을 지치게 했지만, 각자 한계를 마주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청춘들이 할 법한 고민과 꿈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 <청춘에 맞서>는 어찌 보면 진부한 소재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준서, 이윤아, 강준우가 동해안 종주를 위해 자전거 페달을 돌리자, 이 진부한 소재는 재기발랄함과 뜨거운 열정을 확인하는 동력으로 자리한다. 처음에는 목표를 찾지 못하는 듯 자전거 페달을 밟기에 급급했던 그들은 금방 지치고 만다. 하지만 한계 앞에서 청춘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힘들 땐 쉴 줄 알고 멈출 줄 안다. 누군가와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자전거를 타고 동해안을 달리는 인물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는 듯 시원한 바람이 전해지는 것 같다. 모처럼 청량한 청춘 다큐다. (김필남) |
바이킹 Viking
극영화|컬러|33분|2023
DIRECTOR 박천현
민찬은 우연히 옛 연인인 혜경의 이별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혜경과 잠깐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바이킹은 한자리에서 똑같은 구간을 오가는 놀이기구이지만 높이가 올라가면서 점차 감정이 고조되고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 감정이 해소되며 멈춘다. 영원히 바이킹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그 끝은 분명 존재하고 결국 우리는 내려 익숙한 길을 걸어 나가야 한다. 주인공 민찬(전두식)도 마찬가지이다. 매일 똑같은 일상의 하루를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그는 우연히 옛 연인 혜경(안주리)과 마주하게 되고 지금껏 하지 못했던 대화를 위해 길을 나선다. 그들은 마치 바이킹을 탄 듯 서로 다양한 감정을 느끼지만 결국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함을 안다. 촬영을 주로 해왔던 박천현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본인이 직접 촬영을 하였는데, 그가 가진 감각적인 컷 구성과 뛰어난 영상미 엿볼 수 있다. 평상시엔 카페 알바를 하며 자신의 글을 쓰는 민찬의 일상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혜경의 환상 장면은 평이했던 일상에 특별함을 더하게 되고 그것이 영화의 다채로움으로 이어진다. 바이킹 운행은 끝났지만 민찬이 고민 끝에 쓰기 시작한 글과 그의 미소를 통해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응원을 하게 될 것이다. (김민근) |
어린 겨울 Little Winter
극영화|컬러|18분|2023
DIRECTOR 김가현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 같은 반 친구인 수정과 주희는 함께 땡땡이를 친다. 오랫동안 수정을 좋아해 온 주희는, 그곳에서 피하고 싶은 과거의 한순간과 마주한다.
프로그램 노트 주인공 주희(서하림)는 수정(이하람)을 항상 걱정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에서 발현되는 모습일 것이다. 누구나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면 주희가 수정을 대하듯 사려 깊은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볼 것이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일 땐 고개를 돌릴 것이다. 김가현 감독은 자신만의 감성으로 짝사랑하는 주희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제는 단어만 들어도 향수를 일으키는 편지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그것만이 가지고 있는 감성을 영화에 잘 녹여낸다. 과거와 현재의 수정이 중첩되는 장면에서는 편지 내용이 프레임 안에 자막으로 쓰이는데 이는 영화가 담고 있는 분위기와 정서에 적절하게 배합되어 잔잔했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또한 영화음악은 전체적인 영화 톤에 마무리 붓질을 하듯 감정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고등학생에서 이제는 곧 성인이 되는 그들의 겨울은 제목처럼 어리고 차갑지만 그 계절이 지나면 분명 봄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감정과 관계에도 미묘한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감정들을 돌이켜 생각해볼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김민근) |
[경쟁3]
시월 October
다큐멘터리 | 혼합 | 30분|2023
DIRECTOR 장예림
나의 고향, 여수와 부산. 두 곳엔 기억과 망각 속 반복된 시월이 스며있다. 결코 우연이 아닌 시월은 그렇게 울긋불긋 물들었다.
프로그램 노트 1948년 여수와 1979년 부산은 얼마나 멀리 있으며, 또 얼마나 가까울까. 한국 근현대사에서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1979년 10월 부마항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각자의 이유로 상대적 조명을 덜 받았다. 영화는 ‘나의 고향 여수와 부산’이라는 자막을 띄우며 서막을 연다. 감독은 사적 기억으로 두 공간의 장소성을 세밀히 들여다본다. 유령처럼 도처를 떠도는 카메라는 과거의 상흔이 아로새겨진 장소들의 현재와 마주한다. 그 곳은 어느새 관광지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과거의 상징성은 사라진 채 자리 잡고 있다. 그 장소성을 토대로 <시월>은 끊임없이 망각에 저항한다. 단단한 결기 속 흑백 화면의 장소들은 잠시 멈추거나 느려지거나, 우회하며 인간의 기억을 형상화한다. 환원되지 않음을 구체화한 사운드 디자인, 에세이적인 작법으로 다가가는 감독만의 이정표를 따라가 만나게 되는 놀라움을 경험해보시길. (이동윤) |
흐린 영화 Gloomy
극영화|컬러|27분|2023
DIRECTOR 장서우
독립영화 촬영장에서 연출부 막내인 ‘서정’은 조연 배우 ‘영화’를 탐탁잖아 한다.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서정'은 촬영이 끝난 후, 사무실에 치킨 배달을 온 '영화'를 발견하고, 둘은 촬영장 밖 각자의 이면을 발견하며 가까워진다. '영화'의 촬영 마지막 날, '서정'은 조감독으로부터 '영화'의 촬영 분량이 삭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지만, 사실을 전달하기를 망설인다. 끝내 '서정'은 '영화'에게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영화'는 아쉽게 촬영을 끝마치게 된다. 다음날, '서정'은 '영화'에게 연기를 계속하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촬영장에서 벗어나 '영화'를 향해 달린다.
프로그램 노트 단편 영화 연출부 막내 서정(김보아)은 스케줄 조정부터 잡일까지 도맡는다. 현장에는 영화 속 조연 영화(김보라미)가 그녀 곁을 맴돌고 서정은 이런 영화가 다소 못마땅하다. 하지만 각자의 사연이 이어지고 둘은 이내 가까워진다. 마지막 촬영, 영화의 촬영 컷이 삭제되고 서정은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할지 말지 갈등한다. <흐린 영화>는 메타 영화(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의 외피를 두르고 있다. 다만 이 테두리보다 중요해 보이는 것은 인물이 겪는 피로감이다.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 노동이 수반된 결과이며, 그 과정 속에서 ‘영화 노동자’의 감정을 섬세하게 파고든다. 서열 하단에 놓인 두 여성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쉽고 간편하게 연대나 지지를 말하지 않는다. 영화(인)의 자질을 획득하기 위한 두 사람의 고군분투는 복잡 미묘한 현장의 위계질서와 완력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그저 각각의 시선이 교환될 뿐이다. 그 단아하고 정직한 시선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이동윤) |
살이 살을 먹는다 Laid-back Town
극영화 | 컬러 | 29분|2023
DIRECTOR 전소영
지와는 오랜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 잠만 잔다. 잠에서 깬 지와는 예전에 함께 사업을 함께 하기로 한 민식을 찾으러 돌아다닌다.
프로그램 노트 어느 시골마을. 낡은 집 안에서 잠을 자는 ‘지와’(유영우)와 일기를 쓰는 그녀의 언니 ‘공가’(나애진). 그곳을 채우고 있는 겨울바람 소리와 은은한 조명. 영화의 첫 도입부이다. 잠만 자는 정적인 모습인 지와와 일기를 쓰며 삶은 계란을 먹는 상대적으로 동적인 공가의 모습에서 둘의 온도차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또한 곰팡이가 핀 벽지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들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향을 벗어나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곰팡이가 끊임없이 피지만 매번 벽지를 갈아야 하는 공가와 벽지를 갈아도 소용이 없다는 지와. 그렇다. 공가는 자신의 터전에서 계속 살아가려는 인물이고 지와는 그곳을 떠나려는 인물이다. 영화는 두 주인공의 모습뿐만 아니라 마을에 살아가는 다른 중장년층들의 모습 그리고 외지인 ‘민식’도 비중 있게 보여준다. 그들은 이제 어디론가 떠난다기보다 정착을 해서 살아가는 인물로 비친다. 각자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생각을 병렬시켜 보여주고 옳고 그름이 아닌 각자만의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감독의 태도가 느껴진다. 남아있던, 떠나던 그들 각자만의 고민과 삶의 방식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선택을 응원한다. (김민근) |
[경쟁4]
지구 종말 vs. 사랑 Apocalypse vs. Love
극영화 | 컬러 | 32분| 2023
DIRECTOR 전수빈
윤진은 ‘청년 글짓기 교실’에서 만난 해경의 갑작스러운 고백을 거절한다. 하지만 글짓기 교사 영지는 다음 수업 때까지 공동 글짓기를 해 올 것을 두 사람에게 제안한다. 얼떨결에 한 조가 된 두 사람은 각자 ‘종말’과 ‘사랑’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견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결국 대화는 치열한 공방으로 치닫는다.
프로그램 노트 해경(김현목)은 글짓기 수업을 함께 듣는 윤진(정의진)에게 진심을 담아 고백하지만 면전에서 까인다. 이후 두 사람은 한 조가 되어 글을 쓰게 되고, 어떤 주제로 쓸지 논의한다. 윤진은 지구 종말, 해경은 사랑을 선택하고 둘의 대립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질문을 드려보겠다.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랑나무 한 그루를 심을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단편 극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시나리오의 정수처럼 영화는 새롭게 이어질 관계의 종착역에 대해 감독 특유의 텐션으로 이리저리 휘몰아친다. 씬에 대한 전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개별 숏은 개별 씬 최적의 마디마다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 너무나 귀엽다. (이동윤) |
누룩의 시간 Time of yeast
다큐멘터리|컬러|19분|2023
DIRECTOR 박민경
곡식이 썩지 않고 술이 되게 하는 누룩의 특성에 매료된 나는 울주의 한 도가를 찾는다. 그곳에서 누룩을 만드는 아주머니들을 만나고 바쁜 농가의 삶 속에서 누룩 만드는 일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듣게 된다. 계속 미뤄지던 ‘누룩 만드는 날’이 드디어 정해지고, 모두 도가에 모이게 되는데 긴장한 탓인지 나는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만다.
프로그램 노트 곡식이 썩지 않고 발효되어 술로 변하게 하는 누룩. 감독은 누룩을 만드는 아주머니들을 찾아다니며 도가에서 누룩을 만드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사실 이 다큐는 누룩을 만드는 시간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룩을 디디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과 누룩을 만들 줄 아는 아주머니들과 나누는 대화가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기다림의 끝 속에 기어코 누룩이 만들어지는 시간을 지켜보는 일은 어쩐지 경건하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한다. (김필남) |
찐 감자 POTATO
극영화|컬러|19분|2023
DIRECTOR 강다현
언제부터인지 아빠가 감자로 변한다. 딸 윤희는 처음으로 감자를 데리고 짧은 나들이를 떠난다.
프로그램 노트 주인공 윤희’(신민경)의 아빠(이기준)는 영화번역가이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한 번씩 감자로 변하는데 윤희는 그런 아빠의 모습이 탐탁지 않다. 아빠가 번역한 영화 티켓을 그가 아닌 삼촌(이시형)한테 건네받게 된 윤희는 감자로 변한 아빠와 함께 짧은 외출한다. 아빠의 일상을 삼촌이 전달할 정도로 영화 속 부녀의 관계는 굉장히 어색하고 냉랭해 보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 그러한 부녀의 관계가 정확히 나오진 않지만 윤희가 감자를 대하는 태도와 아빠의 작은 행동에서 말은 하지 않아도 둘의 애틋함을 느낄 수 있다. 아빠가 감자로 변한다는 판타지적인 아이디어는 일상의 특별함을 더하고 있고 그에 맞는 컷 구성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또한 그로 인해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은 관객에게 미소를 머금게 한다. 잔잔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잘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감독의 고민이 절실히 느껴진다. (김민근) |
로나 Rona
극영화|컬러|16분|2023
DIRECTOR 지준혁
로나는 엄마의 부탁을 받고 집이 허물기 전 살아생전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사진을 가지러 간다.
프로그램 노트 ‘로나’(김민하)는 엄마의 부탁을 받고 살아생전 본 적 없던 할아버지(임형태)의 낡은 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겪게 되는 미스터리한 일들이 바로 영화 내내 흐르는 무드다. 간결하면서도 확신을 가지는 숏 구성은 영화에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가운데 한국적인 음악과 이미지들은 영화를 더욱 몽환적으로 만든다. 이 여정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불안이 이제는 모두 끝났을 거라고 예상했을 때, 영화는 다시 한번 반전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는 마치 바이러스가 온몸에 퍼지는 것처럼 천천히 서서히 진행된다. (김필남) |
[경쟁5]
양치기 A Good Boy
극영화|컬러|107분|2022
DIRECTOR 손경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어른과 아이의 이야기. 수현(여/30세)은 6개월 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 4년 차 초등교사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주말에는 보육원 교육 봉사를 갈 정도로 아이들에게 애정이 많다. 수현의 반 학생 요한(남/12세)은 가정폭력에 고통받는, 정에 굶주린 아이다. 몸도 마음도 허기진 요한은 다정한 담임 선생님 수현에게 엄마처럼 기대려 하지만, 정도가 과한 탓에 거부당한다. 크게 실망한 요한은 수현이 자신을 때렸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던 수현의 일상은 요한의 거짓말로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양치기>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선의는 악의로 돌아오고, 거짓과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만들며 관객들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4년 차 초등학교 교사 ‘수현’(손수현)은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소년 ‘요한’(오한결)의 거짓말로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든다. 영화는 누가 보아도 약자로 보이는 한 소년에게 보낸 선의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오는지, 가정에서 버림받은 소년이 자신에게 관심을 주던 유일한 상대에게 가하게 되는 폭력과 그럴 수밖에 없음을 소름 끼치도록 잘 표현한다. 마치 한 편의 공포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감독의 연출도 인상적이다. (김필남) |
[경쟁6]
해야 할 일 Work to Do
극영화|컬러|103분|2023
DIRECTOR 박홍준
한양중공업의 입사 4년차 대리 강준희는 인사팀으로 발령을 받는다. 수주 절벽을 맞이한 조선소. 회사 채권단으로부터 구조조정 지시가 인사팀으로 내려온다. 하고 싶진 않지만,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라 생각하는 인사팀. 인사팀은 구조조정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끝내기 위한 작업을 한다. 회사 입맛에 맞는 근로자 대표를 선출하고, 해고 대상자 선발 기준을 세우고자 한다. 이런 회사의 습성을 잘 아는, 소위 블랙리스트 직원 몇몇이 회사의 행보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다. 하지만 큰 위협이 되지 못한 채, 결국 구조조정은 시작되는데...
프로그램 노트 부산국제영화제 비전 부문에서도 소개된 <해야할 일>은 영화의 전당 워크숍 출신 박홍준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다. 실제 박홍준 감독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정리해고를 실행해야 하는 주인공 준희(장성범)와 회사 내에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획일화된 캐릭터로 그려내지 않고 입체적이고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외부적인 문제가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들 때 그들 각자만이 가지고 있는 갈등의 심화를 점진적으로 그려내며 아주 섬세하고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이야기와 주제로 보면 한 번쯤 봤을 법하지만 한 치의 집중도 잃지 않게 하는 이 영화의 힘은 박홍준 감독이 얼마나 시나리오를 공들여 썼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연기 또한 그러한 집중을 한 층 더 높여주는데 특히 내면의 갈등을 담백하면서도 묵직하게 연기하는 장성범 배우의 연기는 관객들을 스크린 안으로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다. (김민근) |
스펙트럼 부산 - 나우
[비경쟁]
배우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싶으세요? who's the actor?
극영화┃혼합┃28분|2023
DIRECTOR 박천현
배우인 길호와 민국은 자기가 하고 싶은 역할을 정해 매달 유튜브 영상으로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배우인 유정과 세완을 만나게 되고 길호는 둘 사이에서 각각 다른 연기를 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선택을 안 해, 선택을!”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물체들, 푸념 섞인 목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화면이 이내 밝히는 곳은 어느 오디션 장이다. 자신을 향한 관계자들의 무관심, 그로부터 오는 모멸감을 견디며 준비한 연기를 이어나가는 배우의 얼굴은 결국 평정심을 잃고 일그러져간다. 이는 배우인 길호(전두식)가 동료와 함께 기획하고 연기하며 만든 영화의 한 장면임이 곧 드러난다. 직접 만든 영화 안에서 길호가 맡은 배역은 연기하는 사람, 배우다.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모니터를 통해 바라볼 시간을 갖게 되는 길호. 화면 속 자신의 모습이 오늘따라 낯설어 보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듯 하다. 누군가의 선택을 받는 일은 배우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보겠다는 투지로 시작했을 행위가 거듭될수록 길호는 본연의 자신과 가상의 배역의 경계에 놓이는 경험을 한다. 길호가 연기한 인물은 누구일까? 답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거기에 다만 우리는 모든 이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전부 다 알지 못하면서도 매 순간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남영) |
당신이 그린 여름 Our Summer
극영화┃컬러┃19분|2023
DIRECTOR 윤가연
엄마의 생일을 맞이해 상구는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여자친구와 함께 고향으로 향한다.
프로그램 노트 상구(김다솔)가 여자친구 영주(손예원)를 데리고 시골에 계신 어머니 미숙(강애심)을 찾는다. 시골의 화창한 날씨와 풍성한 녹음이 대번 눈에 띈다. 그러나 이보다 아름다운 것은 무척이나 너른 미숙의 마음이다. 미숙은 처음 만난 영주에게 티끌 없이 다정하다. 영주도 그런 미숙에게 부담 없이 살가운 마음을 피운다. 이렇게 셋은 별다른 탈 없이 아주 소박하고 행복한 하룻밤을 지낸다. 하지만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 있다. 상구는 영주와 본인의 어떤 거짓말 탓에 자꾸만 마음이 불편하다. 그 비밀이 밝혀질 때의 자그마한 충격도 본작의 정수라 할 법하다. <당신이 그린 여름>은 욕심이 없어 깨끗한 영화다. 인서트로라도 잔뜩 넣고 싶었을 만한 시골 풍광이나 이야기의 잉여를 최소화하며 단편의 미덕을 살뜰히 지킨다. 하지만 서사의 단서와 정보가 장면마다 잘 갖춰져 있어 극의 몰입엔 아무런 이질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컷과 소리에는 인위의 개입 없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분위기만이 감돈다. 무엇보다도 어머니 역을 연기한 강애심 배우의 피부는 삶의 시간을 고스란히 머금은 듯해 더할 나위 없이 인간적이다. 단출할 만큼 겸손하고 깨끗하지만, 관객에게 주는 삶의 자극이 커다란 작품이다. (이우빈) |
메이 앤 준 May and June
극영화┃혼합┃35분|2023
DIRECTOR 박천현
승길과 윤진은 결혼을 앞둔 무명 배우다. 둘은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단편영화를 찍고 배우의 꿈을 접기로 한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영화만을 살 수는 없다. 영화는 반드시 삶, 혹은 현실과 이어진다. 윤진(설찬미)과 승길(신진영)은 배우지만, 그들에게 기회가 좀체 주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연기 영상도 찍고, 더 나아가 영화를 제작해본다. 연출자와 PD로 일하는 동시에 이를 배역 삼아 연기를 하는 둘의 영화제작과정은 연기워크샵이기도 하다. <메이 앤 준>은 두 사람이 만드는 영화와 현실 사이에 형성되는 여러 겹들을 능숙하게 엮어내 매력적인 드라마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 작동하는 소박하고도 강력한 전제에 나는 더 시선이 머문다. 역량의 한계, 현재도 미래도 알 수 없는 불안 앞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는 깊은 마음 말이다. 김규항은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경로는 사랑이라고,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신할 때 어지간히 고단한 삶속에서도 행복하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길을 선택하든 행복할 것이다. 그들이 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김지연) |
김밥이에요! It’s Gimbap!
극영화┃컬러┃13분|2023
DIRECTOR 이강욱
손님 하나 없는 김밥집에 삐삐가 나타났다.
프로그램 노트 인정한다. 산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고달프다는 것을. 우리는 내 마음과 같지 않은 일과 사람 앞에서 포기하거나 냉소를 보내기가 쉽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씩씩하게 전진하는 태도는 언제나 더 어려운 법이다. 이강욱은 <아듀, 오맹달>(2021)에 이어 <김밥이에요!>에서도 역시 판타지와 유머, 장르를 통과해 그런 세계를 구현하려 애쓴다. 이번에는 말괄량이 삐삐가 김밥가게에 나타나서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한바탕 흔들고 지나간다. 어른이 된 우리는 삶과 현실이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해도 사람을 살게 하는 건 그런 순간들이다. 그러니 이강욱의 인물은 삶과 현실에 지칠 순 있지만 결코 가엾지 않고, 상황이 나쁘더라도 구차하지는 않다. 서툰 솜씨로 만든 티가 역력하고 그걸 애써 숨길 생각이 없는 영화의 효과와 미술도 마찬가지다. 환영성을 무시하며 뻔뻔스럽게 건네오는 재치와 익살, 그 기저에 흐르는 천진한 감성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잔잔한 동요를 일으킨다. (김지연) |
엄마의 정원 Mother's garden
다큐멘터리┃컬러┃16분|2022
DIRECTOR 장인자
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엄마의 뒷모습, 책읽는 노년의 엄마목소리, 아파트 뒤편에 가꾸어 놓으신 엄마의 정원, 그런 일상들이 엄마의 기도였고, 그 정원에서 자란 자녀들은 무성한 풀처럼 익어간다. 그 고마움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프로그램 노트 이 작품을 위해 만든이가 쓴 짧은 글을 다시 옮겨보고 싶다. “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엄마의 뒷모습, 책 읽는 노년의 엄마 목소리, 아파트 뒤편에 가꾸어 놓으신 엄마의 정원, 그런 일상들이 엄마의 기도였고, 그 정원에서 자란 자녀들은 무성한 풀처럼 익어간다. 그 고마움을 카메라에 담아 보았다.” 나는 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완성된 영화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마다 들었던 생각이 많진 않더라도, 이 영화의 곁에 둘 만한 것인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 보아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꼭 하나, 금방 후회가 들더라도 ‘제25회 부산독립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이 작품을 위해 이런 생각을 쓰고 싶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이미 흘러 가버린 시간이라면, 영화를 만드는 이는 모든 것을 걸고 그 시간에 대한 진심과 존중을 갖춰야 할 것이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주어진 이후, 영화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를 촬영을 준비하며, 카메라를 켜고, 엄마의 길을 몇 발자국 뒤에서 소리 없이 따라나선 이. 누군가의 딸이자, 누군가의 엄마이자, 고마움으로 무성한 첫 작품 <엄마의 정원>을 만든 장인자 님의 아름답고 깊은 마음을 관객들에게 망설임 없이 권하고 싶다. (오민욱) |
후회하지 않는 얼굴 A Face Without Regrets
극영화┃컬러┃25분|2023
DIRECTOR 노영미
인하와 희영의 작업실에 초대받은 재경은,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신다. 재경은 인하로부터, 남편과 자신의 친구인 선우가 오래전부터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후회하지 않는 얼굴’이란 도대체 어떤 생김새의 얼굴을 말하는 것일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유독 제목이 마음에 걸려 그것에 대해 한참 곱씹어 보게 된다. 그리고 영화 내 인물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보기도 한다. 주인공 재경(강진아), 그의 남편 철우(이승현), 철우와 바람을 피운 선우(주인영), 재경에게 외도 사실을 알리는 동료 언니, 재경의 곁에 불쑥 등장하는 희영(김니나)까지. 한편으로 ‘후회하지 않는 얼굴’은 ‘염치 없이 태연한 얼굴’처럼 보인다. 외도 사실이 발각되고도 뻔뻔한 태세로 변명하는 철우나, 도리어 자신의 억울함을 끊임없이 쏟아내는 선우, 그것도 몰랐냐는 식으로 당당하게 외도 사실을 전하는 동료 언니의 모습을 보라. 그들의 얼굴에는 그럴 자격 없는 이기적인 태도가 한가득 서려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멀쩡한 얼굴’이 지닌 힘은 실로 강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잃게 만들곤 한다. 그래서 그들 앞에 선 재경은 마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잃은 망자인 것처럼 보인다. 과연 재경은 ‘어떤 얼굴’로 그들 앞에 서고 싶은 걸까. 영화의 후반부, 재경은 미스테리한 여인 희영과 가까이 대면하고 있다.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처음 드러나는 재경의 ‘분명한 얼굴’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얼굴에 담겨 있는 것들을 모호하게나마 가늠해 보면서. 후회, 후회 없는, 욕망, 동경, 기만, 원망, 달관, 희망, 신비, 초연함 등등. (윤지혜) |
변명하지 않는 당신 dear who don't make excuses
다큐멘터리┃컬러 | 29분|2023
DIRECTOR 전인제
40여년간 한 자리에서 도시의 발전을 지켜본 할머니는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어 이사를 준비한다.
프로그램 노트 요즘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인간은 몇 해 정도의 세월을 지내고 나면 갖은 풍파를 겪고도 초연해질 수 있을까?” 비단 모든 일들이 단순한 시간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버티며 살아낸 이 세상의 무수한 존재들을 목도할 때면, 그저 일상을 담담히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위대한 일인지 불현듯 깨닫게 된다. <변명하지 않는 당신>은 자신의 오랜 집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창순 할머니를 조명하고 있다. 또한 카메라를 든 전인제 감독은 무심한 방관자도 아닌, 과도한 참여자도 아닌, 그 둘 사이의 중간자적 위치에서 대상을 사려 깊게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부산진구 양정 3주택 재개발구역 일대 풍경, 그 안에 자리한 이창순 할머니의 집, 허물어져 가는 집 내부, 할머니의 목소리로 되살아나는 과거의 이야기들. 이창순 할머니는 이미 떠나기로 운명지어진 자신의 오랜 공간을 지속해서 살핀다. 집 구석구석 묻은 찌든 때를 닦아내고 또 닦아낸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이 집에 들어온 처음과 같이, 여기서 나가야 하는 지금에 와서도, 항상 영원할 것처럼. “그저 살다 보면 살아진다.” 빤한 대답일지라도, 백 마디 구차한 변명보다 훨씬 솔직한 한마디 말일 것이다. (오민욱) |
모라동 MORA
극영화┃컬러┃102분|2023
DIRECTOR 김진태
결혼을 앞둔 미래 건축가 선우와 여자친구 우정에게 이혼 후, 할머니와 살고 있던 애물단지 같은 아빠 철구(60)가 뇌출혈로 쓰러진다. 신용불량자인 철구의 엄청난 병원비는 선우에게 부여되고 엄마 미자는 철구를 기초수급자로 만들어야 한다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우정과의 결혼을 꿈꾸던 선우에게 닥친 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재난과도 같은 상황을 극복하고 우정과 결혼에 골인 할 수 있을까?
프로그램 노트 누구든 돌봄의 문제에 직면한다. 부모의 부양이든, 자녀의 육아이든, 또는 어떤 형태일지라도 평생 타인을 돌보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누구든 해야 한다고 하여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모라동>은 이 어려움의 과정을 안정적인 플롯 구성과 연출을 통해 수용성 높은 이야기로 소화한다. 주인공 선우(이동휘)는 여자친구 우정(한지은)과의 결혼을 앞두고 상견례 자리를 마련한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 철구(강신일)가 뇌출혈로 입원한다. 어머니와 갈라선 지 오래되어 끽해야 1년에 한두 번 보는 아버지다. 그러나 선우는 아들 된 몫을 지키려 각고의 노력에 임한다. 병원비를 마련하려 백방으로 발품을 팔고 주변에 도움을 빌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우정과의 관계는 어긋나고, 결혼 논의마저 흐지부지된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병원과 동사무소의 서류들은 <이키루>의 관료제처럼 인간의 삶을 거꾸로 옥죄려 한다. 그러나 희망 역시 세상에서 핀다. 가족보다 따스한 타인의 손길, 과거의 아픔을 묻어가는 시간, 나의 힘듦을 어루만져 주는 말 몇 마디로 선우는 종종 숨통을 틘다. 그 숨의 시간에서 나오는 인간미가 <멋진 인생>과 같이 연말에 잘 어울릴 법한 포근함을 자아낸다. (이우빈) |
흙으로 돌아가리라 Forgotten Soldier
극영화┃컬러┃68분|2023
DIRECTOR 이하람
한국전쟁 당시 북측에 수도인 서울을 내어주고 후퇴하던 남한측 어느소대는 기습을 받고 죽거나 흩어지게 된다. 그 과정에 한 병사는 산으로 숨어들게 되고 기을 잃고 헤맨다. 그러던 중 어느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를 따라 산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려하지만 소녀를 따라나선 곳은 죽음뿐이다.
프로그램 노트 장면 하나의 힘이 영화보다 큰 작품들은 있다. 그러나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모든 장면의 장력이 늘 영화 전체를 뒤덮는 듯하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은 본작을 영화 같지 않은 이상한 것으로도, 혹은 모든 개별 이미지의 품종에 집착하는 시네아스트의 건전한 집착으로도 만들어 낸다. 전작 <기행>과 같이 이야기는 간단하다. 한국전쟁 당시 소대에서 이탈한 한 병사가 의문의 소녀를 만나 함께 남쪽으로 도망치려 한다. 그러다가 산속 주민들이나 다른 병사를 마주치면서 갈등한다. 이야기의 골자가 단순하다고 하여 영화의 내러티브가 친절하진 않다. 이는 플롯이 비선형적이라거나 영화가 애써 서사의 정보를 감추기 때문은 아니다. 전술했듯, 매 장면의 색채가 너무 강인하여 이야기의 흐름을 잡아먹는 사례에 가깝다. 4대3 비율의 좁은 화면은 인물들의 커다란 얼굴을 기괴하게 보여주거나 기묘한 숏의 구도를 만드는 데에 적극적으로 일조한다. 가령 소녀와 병사의 투숏에선 헤드룸이 화면의 8할을 차지한다. 인간의 그림자와 빛의 일렁임이 인물 대신 화면을 채우면서 대화의 내용을 잠식한다. 더군다나 화면 질감의 대개가 저열하고 종종 과다 노출로 번져 있기에 시각적 자극과 방해는 끊이질 않는다. 전작 <기행>에 이어 여러모로 많은 논의를 부를 작품이다. (이우빈) |
교토에서 온 편지 A Letter From Kyoto
극영화┃컬러┃102분|2022
DIRECTOR 김민주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혜영은 서울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자 고향인 부산 영도로 내려간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의 방에서 일본어로 쓰인 편지를 발견하고 엄마의 과거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비로소 엄마는 자신의 오래된 기억을 묻어둔 교토에 가기로 결심한다. 그것도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는 세 자매와 함께. 차녀 혜영(한선화)은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장녀 혜진(한채아)은 계속해서 고향에 머물며 엄마와 막냇동생 혜주(송지현)를 비롯한 집안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아직 고등학생인 혜주는 가족 몰래 춤 연습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춤을 추며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고향은 저마다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곳은 절실하게 가고 싶은 곳임과 동시에 격렬히 벗어나고 싶은 곳이며, 쉽게 떠나가지 못하는 장소인 한편, 타지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 인간은 타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던가. 따지고 보면 영화 속 네 인물은 한 번씩 타향살이 경험을 한 셈이다. 교토를 떠나 부산으로, 부산을 떠나 서울로,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분명히 타지에서도 그곳만의 낯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고향에 대한 애착 또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히 느끼게 될 것이다. <교토에서 온 편지>는 방랑에 대한 동경과 고향에 대한 동경, 그 사이에서 고요히 격동하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반드럽고, 유려하게 풀어나가는 드라마 영화다. (윤지혜) |
스펙트럼 부산 - 리와인드
[비경쟁]
팬지와 담쟁이 Pansy & Ivy
다큐멘터리ㅣ컬러ㅣ60분ㅣ2000
DIRECTOR 계운경
<팬지와 담쟁이>는 장애인 자매인 수정과 윤정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어느 날 수정은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윤정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수정이 그 남자와 잘 되기를 바라며 마구 부추긴다. 하지만 남자는 끝내 수정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고백한다. 수정과 윤정은 결혼을 꿈꾸지만 쉽지가 않다.
프로그램 노트 김수정과 윤정은 저신장 장애인 자매이다. 이들의 일상을 따르는 영화 속의 현실은 제작연도인 2000년과 지금 현재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 살아가기엔 여전히 배려가 부족한 사회다. 카메라의 시선이 인물들의 이동수단으로 유용한 어린이용 장난감 차에 잠시 머물 때, 울퉁불퉁한 길을 다니는 걸 지척에서 볼 때, 마트의 높은 진열장을 오르고, 지하철의 요란한 리프트를 타고 내려오는 걸 볼 때 그렇다. 하지만 불편함을 받아들인 인물들에겐 이미 익숙한 일상인 것 같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들로부터 기존체제에 맞서 싸우고 현실을 극복하려는 운동가의 면모를 찾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상대의 마음이 궁금하고, 결혼과 출산을 희망하고, 웨딩드레스의 꿈이 차가운 현실 앞에 부딪히더라도, 그들은 모두가 인격체로 각자 나름의 평범한 삶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김지연) |
러닝 포토스 Running Photos
실험 | 혼합 | 6분|2015
DIRECTOR 김나영
장 뤽 고다르의 1962년작 <비브르 사 비>의 한 장면에서 출발해, 여러 영화 속 인물의 달리는 장면과 머이브리지 이미지, 영상의 확대, 역재생, 반복 등을 활용해 편집했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김나영은 영화로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서 보는 걸 가장 좋아할 것이다. 영화 초반, 한 발을 떼기 전에 다른 발을 떼는 것이 가능한지 생각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머이브리지가 달리는 말의 움직임을 연속촬영하는 데 성공한 영화사의 일화와 연결된다. 걷거나 달릴 때 한쪽 발이 반드시 지면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과학에 기여한 그의 연속사진은 환등기와 함께 영화로 발전해 현재 환영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영화광들일 것이다. 또한 <러닝 포토스>에 쓰려고 골라냈을 장면들은 그가 봤을 더 많은 영화를 상상하게 하는데, 그의 목록에 있는 작품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슬쩍 신호를 보내온다. 각기 다른 이유로 인물들이 달리는 모습이 역재생과 재생으로 이어지면, 원본 영화에서 그 장면이 놓인 맥락을 떠올려 보는 건 당연한 일일 터. 그런 이유로 이 영화는 데이빗 보위의 '모던 러브'가 흐르고 드니 라방이 달리기 직전에 끝낼 수 있다. 원본 영화 <나쁜 피>(1986)의 질주를 아는 사람들에겐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레오 카락스, 장 뤽 고다르, 버스터 키튼과 같은 사전정보가 없더라도 이 영화는 유효하다. 우리는 이미 달리기라는 행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제가 속한 영화의 맥락을 절단하면 순수한 움직임을 품은 숏만이 남는다. 지면을 박차고, 한 줄기 바람이 되어, 그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중력에서 벗어날 것 같은 자유의 순간, 숨이 차고, 심장이 뛰며,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들. 인간이 신체로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정직한 움직임, 달리기. 그 행위를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모두에게 충분히 즐거운 경험이 된다. (김지연) |
섬 island
실험 | 혼합 | 15분|2020
DIRECTOR 김종한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 ,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
프로그램 노트 <섬>에는 인간과 인간의 손길이 닿은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사위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창 활력이 넘쳐야 할 한낮의 도시에는 차가 멈춰 섰고, 건물 대부분은 비어 있다. 그리고 남겨진 인간들은 움직임과 말을 잃은 채로 지내고 있다. 어떤 순간엔 스크린에 영사되고 있는 이미지가 정지된 사진 이미지인지, 활동하고 있는 영상 이미지인지 쉽게 분간되지도 않는다. 이미지의 활동을 증명하는 것이 영화의 의무는 아니겠지만 영화를 보러 오는 대부분의 관객은 활동하는 이미지를 목격할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객석에 앉았을 것이다. 그러한 관객들로서는 영화관에서 정지된(것처럼 보이는) 이미지와 맞닥뜨리는 상황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관객을 당황케 하는 그 이미지들은 고정된 것처럼 보일 뿐, 여전히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스크린 변방에서 작고 가벼운 사물 하나가 바람에 나부끼며 여전히 그 세계가 활동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스크린을 샅샅이 뒤져야만 그 세계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순간들은 <섬>에 스쳐 지나간 얕은 숨결을 가진 사람들을 환기시킨다. 그들은 <섬> 안에 생겨난 또 다른 섬이다. 한 섬 안에 있지만 그들 각자의 공간 사이에 생겨난 무수한 빈 공간이 이들을 또 다른 섬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이 사위어 가고 있는 적막한 이 섬의 곳곳을 경이롭고 두려운 자연이 단단히 에워싸고 있다. 김종한이 카메라로 찍은 빈 공간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압도하고 있는 자연의 풍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것'과,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이 완전히 다른 의미임을 관객에게 드러내고 있다. (성동욱) |
철원에서 A Border Line
극영화 | 컬러 | 17분|2018
DIRECTOR 김혜정
배우생활을 그만두고 예술강사일을 하고 있는 남희는 강원도 철원으로 수업을 하러 간다. 하지만 숙소를 잡는 것부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 까지 어느 것 하나 순탄치가 않다. 어떻게든 할 일을 다 마친 남희는 부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로 향하지만 어이없게 차를 놓치게 되고 남희는 철원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어서 잊어버리고 마는 삶의 작은 순간들이 있다. <철원에서>는 그런 것들을 영화에 불러온다. 예술강사의 생활을 알지 못해도, 우리는 돌부리에 걸리는 일들을 대하다가 삶이 힘에 부칠 때, 더 가는 것도 되돌아가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없을 때, 모든 것이 끝없이 낯설어서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는 안다. 막차를 놓치고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시간 동안 주인공은 여행자가 되어서 철원을 즐겨본다. 그제야 비로소 좋은 날씨와 풍경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인물의 섬세한 감정의 변화, 그 마음의 행로가 기록된 영화를 보면서 연출자의 다음 작품을 궁금해하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김지연) |
목요일 Thursday
극영화 | 흑백 | 28분|2019
DIRECTOR 윤지혜
보조강사 소정은 직장을 잃고 방황한다. 식당 주인 명호는 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다.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계속해서 스치고 엇갈리는 두 사람의 일상이 만나는 곳은 그들과 닮은 구조물 안이다.
프로그램 노트 보조강사 소정(박세재)은 직장을 잃고 방황하며, 식당 주인 명호(이시형)는 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다. 아주 짧게 이 영화를 설명할 수 있지만, <목요일>은 줄거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이다. 시간과 장소가 불확실하며, 인물들의 만남은 어긋난다. 흑백 화면이 주는 감각은 시간도 서사도 붙잡지 못한 채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인물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 있는 공간(건축물)은 미묘한 감응을 일으킨다. 일상적 공간을 거니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지나쳤을 수많은 만남과 어긋남의 순간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는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긋나지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연결된다. 수요일이 지나면 목요일이 오는 것처럼 윤지혜는 반복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절이 아닌 일상의 흐름을 발견한다. 그리고 <목요일>의 흐름은 그의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필남) |
어디에도 없는 시간 Time Nowhere
극영화 | 컬러 | 21분|2021
DIRECTOR 장태구
승미는 절친한 친구 정현이 서울 회사에 취업한 이후 통 만나지 못했다. 물리적인 거리감은 결국 사람과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까. 코로나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걸까 생각하는 승미는 두 사람의 여행을 떠올리며 달리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어디에도 없는 시간>은 일상과 기억, 꿈의 차원을 순환한다. 한 영화가 과거와 꿈의 이미지를 영화 속 현재의 내러티브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스크린 안의 서로 다른 차원들 사이에는 격차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없는 시간> 속 일상과 기억, 꿈의 차원 사이에는 격차가 희미하다. 이 영화에 시종일관 흐르고 있는 무드가 <어디에도 없는 시간>이 다루는 의식의 여러 층위를 비끄러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팬데믹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재난으로 비롯된 단절보다는 개인들의 일상에 침습하고 있는 보편적 고독감과 서글픔이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영화가 다루는 모든 시간적, 의식적 차원에 개입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차원을 빠져나가거나 도착해야 하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렇게 다차원이 공존할 수 있는 형식을 말미암아 <어디에도 없는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된 선형적 시간관에서 벗어나 일상과 기억과 꿈을 매 찰나마다 순환하고 있는 유기체와 같은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장태구는 서로 다른 차원의 씬들이 전환하는 찰나를 자주 인물들의 응시로 매개하고 있는데, 이는 영화와 영화관, 그리고 관객을 떠올리게 한다. 한 공간에서 타자와 함께 스크린을 바라보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운동성이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나의 좌석과 타자의 좌석, 그 사이 간격을 좁히는 방향으로도 움직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성동욱) |
신탄진 New rapids
극영화 | 컬러 | 20분|2015
DIRECTOR 최정문
사회참여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하나와 친구들. 그 곳에서 우연히 이전에 함께 활동했던 철하를 만나고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흔들리는 기차 안. 사회참여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서울로 향하는 하나(박세재)와 친구들이 기차 안에서 열띤 토론을 이어간다. 덜컹거림 속에서 비춰지는 얼굴들, 불안한 눈빛, 어긋나는 시선들. 부유하는 의견들은 영원히 하나로 모아지지 못할 것만 같다. 그때 한 남자의 뒤를 쫓아 하나가 충동적으로 기차에서 내린다. 남자의 뒤를 쫓아가던 하나가 드디어 남자와 조우한다. 짧고 어색한 대화 후에 홀로 남겨진 하나. 그녀는 왔던 길을 돌아 다시 기차역으로 간다. 최정문 감독은 <신탄진>을 통해 인물의 불안과 동요, 흔들림 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인물의 표정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영화적 표현이 가능함을 알려준 이 작품은, 최정문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킨다. 지금 보아도 세밀한 내면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김필남) |
나는 집으로 간다 I'M GOING HOME
극영화ㅣ흑백ㅣ16분ㅣ2015
DIRECTOR 김수지
고등학생인 가출소년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큐멘터리를 찍는 여자를 만난다. 산동네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로드무비.
프로그램 노트 촬영현장에선 온갖 변수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중에서 가장 난감한 것이 스태프들이 어찌할 수 없는 날씨다. 일정을 조율할 수 없는 촬영일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결국 시나리오 또는 콘티를 변경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집으로 간다> 역시 우중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영화였다. 그것도 마지막 회차에 보통 비가 아닌 폭우가 내렸다. 단순한 동기에서 가출한 고등학생이 우연히 동네에 관한 다큐를 찍는 감독을 만나 하루동안 어설픈 동행을 한다. 누군가에겐 빤한 일정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시간이 된다. 마지막,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학생의 집앞에서 폭우가 내렸다. 어른의 입장에선 질책일 수도 있고 그들의 하루에선 특별한 비일 수도 있었다. 날씨가 영화 안에서 기억되는 건 아마도 영화를 만듦에 있어서 영화가 갖는 변화무쌍함과 신비가 아닐까. 김수지 감독의 작품을 함께 하기도 하고 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머릿속에 그 연출방향이 선명하게 그려지진 않는다. 그런 점 때문에 기대하게 된다. 느닷없는 날씨의 변화처럼 다가올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고 있다. (전인룡) |
집 속의 집 속의 집 The House in a House in a House
다큐멘터리 | 컬러 | 24분|2017
DIRECTOR 전찬영
내가 싫어하는 아빠의 모습들이 나에게서 보일 때 마다 스스로를 쓸모 없다고 여겼다. 나에게 집은 휴식의 공간이 아닌 죄책감의 공간이다. 나는 집에서 스스로를 자기혐오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아빠를 싫어하게 되는 것도 모잘라, 스스로를 싫어하게 만든 아빠를 증오했다. 나는 왜 가장 쓸모없다고 여기는 아빠에게 이해 받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걸까? 아빠를 통해 나를 찾는 ‘나’ 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까?
프로그램 노트 전찬영은 가족과 여성에 대한 관심으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왔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 이력 대부분은 장편 <다섯 번째 방>(2022)에 이르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은 늘 같은 문제로 갈등하는데 그 중심엔 아빠가 놓인다. 시대가 변했지만, 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아서다. 아빠의 논리는 다른 가족구성원들이 참으면 되는 일을 굳이 따지니까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아빠로부터 내가 있게 되었고, 아빠의 싫어하는 모습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 전찬영은 괴롭다. 그런데 아빠를 온전하게 미워할 수도 없다. 혼란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전찬영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향해서 카메라를 든다. 영화엔 식사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는 자연스러운 일상도 있지만 다양한 시도가 함께 한다. 전찬영의 얼굴에 아빠의 목소리로 더빙하거나, 부녀가 비슷한 모습으로 포즈를 취해보는 장면들, 서로에게 거울을 비춰보는 것과 같이 작은 퍼포먼스들이 추가된다. 그냥 아빠니까 아빠가 좋다는 남동생, 아빠를 바꿔보려 했지만 포기하게 된 여동생, 순응해 온 시스템에 이의를 제기하며 합의점을 찾으려던 엄마의 노력을 보고 들으며 전찬영은 자신의 마음과 아빠를 이해해 보려는 의식(儀式)을 치르는 과정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김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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