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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26회 부산독립영화제
일시 l 2024. 11. 21. ~ 11. 25.
장소 l 영화의전당, 무사이 극장
개막작
밤의 유령 Night ghosts
다큐멘터리|컬러|60분|2023
DIRECTOR 이창우
대리운전 콜을 잡는 전쟁을 치르며 휴대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대리운전 기사들의 현실과 진상고객에게 듣는 모욕적인 욕설까지 묵묵히 감내하며 목적지까지 차를 몰아야 하는 여성대리기사들의 시린 삶의 현장이 가감없이 펼쳐진다. 한 건이라도 콜을 더 타기 위해 새벽까지 자신을 혹사해야 하는 이들도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다. 대리기사들의 상호부조 조직인 ‘카부기공제회’에 가입하면서 같은 일을 하는 언니,동생을 알게 되었고 이들이 서로 애환을 나누며 심야화장실 찾기 앱도 만들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대리운전 기사를 돕기 위해 십시일반하는 공동체도 키워나간다. 현실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여성대리기사들의 잡초같은 생명력도 만만치 않다.
프로그램 노트 매일같이 밤의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처에 있지만 좀체 보이지 않아서 스스로를 ‘밤의 유령’이라 칭하는 이들의 직업은 대리운전수다. 잘 보이지 않는다는 영화 속 인물의 말을 그대로 옮겨봤지만, ‘콜’에 웃고 ‘콜’에 우는 이들을 실생활에서 만나기가 대단히 어려운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진 않다. 다만 <밤의 유령>은 그간 우리가 자세히 보거나 들으려하지 않았던 여성 대리운전수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그로 인한 고초를 보여줌으로써 그 ‘볼 수 없음’의 속뜻에 한 발짝 다가가게 한다. 바디캠에 고스란히 담긴 심야의 행로에 시선을 겹치다보면 노동의 현장에 도사리는 비상식적 폭력에 덩달아 분개하지 않을 수 없지만, 거친 호흡으로 전해지는 실제 상황을 단순히 극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단 점이 이 다큐멘터리를 감동적인 시선으로 보게 한다. 서로 연대하는 공동체 내부의 움직임과 그런 이들에게 건네지는 따스한 손길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이들의 유령성이 실로 어디서부터 규정되었는지 되묻는다. (함윤정) |
폐막작
(테크노) 사랑해! Love ya! (Techno)
다큐멘터리|컬러|55분|2024
DIRECTOR 손희완
테크노에 몸을 맡겨 춤을 추는 사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공기, 무아, 해방의 영역을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인 쾌감을 통해 하나의 탈출구 혹은 해방을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테크노가 주는 자유로움을 통해 그 속의 숨겨진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공유하여 잃어버린 ‘우리’ 가 되는 여정을 여러 증언들을 통해 그려내본다.
프로그램 노트 테크노에 대한 정의나 통념 같은 사회적 합의의 언어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영화의 방점은 ‘문화’로서의 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랑’의 외침을 듣는 데 찍히기 때문이다. 테크노와의 만남, 그 충격과 환희의 경험부터 기억 속에서 역류하는 슬픔까지.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를 이들이 각자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카메라는 그들의 언어가 도달하지 못한 감정의 공백을 메운다. 여기까진 괄호와 느낌표 사이 단정한 시선을 견지하는 다큐멘터리 같이 들리겠지만, 이것이 <(테크노) 사랑해!>의 전부는 아니고 그래서 흥미롭다. 전작 <아웃풋>(2022)과 <범솔>(2023)에 이어 더욱 호기로워진 감독만의 표현적 이미지가 다큐멘터리에 독창적인 레이어를 더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어둡고 혼란한 채 반복되는 음율이 파멸을 향한 잠수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동력일 수 있음을 알아차릴 때, 그 낯선 생동성과 삶이란 양태의 닮음을 느끼는 순간, 영화는 스크린 너머로 작은 실패를 요청한다. 수줍지만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한 이들처럼 자기만의 테크노를 외쳐보라고. 그것이 무엇이든 둠칫대는 리듬 속에 숨쉴 수 있다면, 가끔은 길바닥에 머리를 처박아도 아무렴 상관 없다고. (함윤정) |
수상결과
| 시상내역 | 수상작 |
| 대상 | <(테크노) 사랑해!> (2024), 손희완 |
| 심사위원특별상 | <밤의 유령> (2023) 이창우 |
| 최우수연기상 | <마네킹> (2024) 오희석 |
| 기술창의상 | <구구맨> (2024) 오나연 |
| 관객심사단상 | <나의 또 다른 세상> (2024) 김소영 |
| 특별언급 | <49재> (2024) 정시연 |
제26회 부산독립영화제 포스터

제26회 부산독립영화제 트레일러
메이드 인 부산
[경쟁1]
도시의 분홍색 발자국 The pink footprints of the city
극영화|컬러|28분|2024
DIRECTOR 이승화
슬럼프로 인해 발레단을 그만두고 전단지 부착 알바를 하며 지내던 희재는 어느날 자신의 전단지를 알고 다가오는 남자, 시윤을 만난다. 당황스러운 시윤과의 첫만남. 그날 이후 희재의 마음 속에는 시윤에 대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생겨나고, 그에게 자꾸만 이끌린다.
프로그램 노트 사랑과 구원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겐 눈앞에 있는 작은 불씨라도 마치 큰 화염처럼 느껴지게 한다. 어쩌면 나에게 맞는 사랑과 구원의 모양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매일 전단지 알바를 하고 있는 희재 앞에 우연히 시윤이 나타난다. 둘은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지만 서로의 모양을 공유한다. 희재는 정말로 가벼워지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 는 반면 시윤은 이미 그 자체로서 가벼워 보인다. 오히려 무거워지기 위해서 혹은 희재가 그전에 포기했던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가는 듯 보인다. 매일 밤 혼자서 희재가 걸었던 도시 의 분홍색 발자국을 몰래 지켜봤던 시윤의 시점을 상상해 본다. 이 만남이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둘이서 함께 추는 춤을 그려본다. (박천현) |
자승자박 옴니버스 Our Ordinary Days
애니메이션|컬러|13분|2024
DIRECTOR 황윤정
애써 외면하려 해도 마음에 밟히는 것들이 있다. 공기 중에 답답한 미움과 한계가 가득하다. 이 공기를 계속 마시다간 숨이 막혀버릴지도 모른다. 그게 딱히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런대로 살아간다. 자신을 옭아매고 서로를 옭아맨다.
프로그램 노트 “맑고 고운 심성을 가꾸도록 우리 모두가 바른 길잡이가 되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습니다.” 어딘가 묘하게 비틀린 안내문은 일단 그렇다 치고 넘어가자. 퍽 강렬하고 재치 있는 다섯 개의 우화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때보다 개성을 중시하면서도 더없이 몰개성한 유행이 판치는 세태, 개인의 노력으론 쉬이 바꿀 수 없는 사회적 인식과 그로 인한 구조의 한계, 계급화된 노동 환경이 초래하는 파멸적 결말, 공동체 내 자행되는 폭력의 아이러니, 맹렬히 끓어올랐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갈아치워지는 인스턴트 식 관계. 각각의 에피소드가 현대 사회의 문제를 꼬집는 동안, 객석에서 마음 편히 웃는 자를 색출하는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자승자박 옴니버스>는 오늘날 진정한 자승자박의 행위자를 건조하게 비웃는, 깜찍하고도 오싹한 애니메이션이다. (함윤정) |
매직대디 Magic Daddy
극영화|컬러|30분|2024
DIRECTOR 서한솔
평생을 바쳐 일해온 직장에서 부장까지만 하고 강제 퇴직을 당한 동식,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을 집에서 달래보려 하지만 정작 딸과 아내는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것 같아 서럽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년 남성에게 찾아온다는 갱년기까지 찾아와 하루종일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그곳에서 피까지 나기 시작한다. 피를 막아보려 애쓰던 동식은 딸의 생리대를 몰래 훔쳐쓰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강제 퇴직 후 집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동식. 갱년기까지 겹친 탓에 나날이 울적하지만 마치 자신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대하는 아내의 핀잔과 딸의 무관심 사이에서 헛헛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불철주야 몸을 바쳐 일해왔으나 하루아침에 본인의 쓸모를 박탈당한 상실감에 빠진 동식에게는 가족 구성원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어 나가야만 하는 숙제가 주어지지만, 하루아침에 변하기란 그도 그의 가족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야말로 ‘중년의 위기’에 봉착한 동식을 괴롭게 만드는 또다른 애로사항이 있다. 그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모종의 증상은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황을 통과하는 사이에 겪는 불안함을 대변한다. 영화 <매직대디>는 이러한 동식의 비밀을 둘러싸고 인물들 사이에 엇갈림과 오해를 쌓으며 이야기를 추동하고 재미를 더한다. 또한, 퇴직 후 새롭게 인생을 설계하는 일, 완경과 갱년기의 말 못할 불편과 고민 등 일생의 한 생애주기를 지나면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상황 속에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려 노력하는 인물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동식을 연기한 정인기 배우를 비롯하여 배우들의 조화가 돋보이는 매끄럽고 유쾌한 가족 드라마다. (이남영) |
[경쟁2]
구구맨 99Man
다큐멘터리|혼합|14분|2024
DIRECTOR 오나연
해운대 바닷가에서 비둘기를 다스리는 김현태 씨가 있다. 그는 매일 오후 해운대 바닷가에 나와 비둘기와 교감을 시도한다. 비둘기와 함께하는 행위에 행인들은 그를 신기해하며 구경하거나 웃는다. 하지만 정작 그가 어떤 사람인진 모르고 지나간다. 그는 왜 매일 비둘기를 밖에서 날리고 있는 걸까? 그에게 비둘기는 어떤 존재일까? 그를 기록하면서 길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던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한다.
프로그램 노트 해운대 백사장에서 비둘기와 교감하는 중년의 남성을 본 적 있는가. <구구맨>은 일명 ‘비둘기 아저씨’라 불리는 인물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미스터리 추적물이자, 쉽게 지나칠 법한 우리의 이웃 ‘김현태’의 삶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을 뽐낸다. 영화는 방송 포맷에서 흔히 쓰이는 전문가의 자문부터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왓츠 인 마이 백’까지 갖은 영상물의 형식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차용하는데, 그 재치에 스스로 잡아먹히지 않고 본연의 주제를 관통하는 연출이 탁월하다. 평범함과 비범함을 동시에 지닌 인물의 개성을 보존하면서도 자칫 김이 빠질 수 있는 대목에서 재차 입체감을 더하는 대목 역시 인상적이다. 더욱이 인물의 과거와 현재와 꿈을 유려하게 꿰는 와중 연출자와 출연자 사이 소소한 유대까지 담아낸 이 다큐멘터리가 고작 13분 짜리 단편이란 사실이 믿어질지 모르겠다. 소재와 접근과 형식 모두 유독 별난데, 이토록 별난 개성 가운데 미운 구석 없이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은 흔치 않다. (함윤정) |
프리사이즈 FreeSize
다큐멘터리|컬러|15분|2024
DIRECTOR 정봄
프리사이즈 옷이 언젠가 자신에게 맞을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살던 영화의 주인공인 봄, 봄은 프리사이즈 옷이 맞지 않는 현실에 화가 나 프리사이즈의 모순을 탐구 하기로 결심한다. 자유로워 보이는 크기의 옷 뒤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파헤치며 봄은 프리사이즈의 새로운 시각을 찾아간다.
프로그램 노트 온통 핑크색 벽지와 바닥, 소품들로 장식된 방의 문이 열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어느 파티에 초대받은 그는 입고 갈 옷을 신중하게 고르다 마침내 원피스 한 벌을 택한다. 그와 동시에 울리는 전화, 그 너머로 마치 현실을 직시하라는 듯 냉정한 일침이 가해진다. ‘그 옷 너한테 안 맞아.’ 느닷없이 틈입하여 환상을 깨트린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주인공이자 감독 자신의 것이다. 언제나 나를 주시하며 자기검열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실제로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영화는 질문하며 나아간다. 본래 품이 넉넉하여 체형에 상관없이 누구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단일한 치수를 의미했던 프리사이즈가 언젠가부터 그 자체로 외형적인 미와 아름다움을 판가름하는 또다른 기준이 되었다. 영화 <프리사이즈>는 감독이 오랜 시간 관심을 가져온 패션 분야에서 직접 경험한 ‘프리사이즈’라는 현상에 담긴 모순과 이를 유리하게 활용하며 획일화된 미의식이라는 사회적인 편견을 강화하고 재생산하는 패션산업의 논리를 지적한다. 또한 영화는 제도와 관습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자신만의 삶의 기준을 찾아 그에 마땅한 선택지를 갖춰나가려는 한 개인의 시도가 담긴 기록이기도 하다. (이남영) |
겨울 숲을 혼자 걸어간다. I walk alone through the winter forest.
실험영화|컬러|18분|2024
DIRECTOR 김종한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전세를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종한. 변하지 않은 집들과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던 공터. 그 시절 아이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프로그램 노트 한 남자가 동네를 걸어 다닌다. 노란색 옷을 입은 남자의 목적은 집을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집을 구하려는 강력한 행동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익숙한 동네를 돌아다니며 예전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이러한 행동은 현재의 집을 구하기보단 과거의 집을 구하려는 기행처럼 보인다. 동네에는 방지턱, 간판, 포크레인 등 수많은 노란색 물체들이 존재한다. 남자가 입은 노란색 옷은 어느 새 도시의 노란색 물체들과 동일시된다. 화면에 남자가 등장하지 않아도 노란색 물체들은 남자처 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젠 그 남자가 없어도 도시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남자는 그러 한 역할을 도시에게 건네줄 마음이 없다. 남자는 이미 떠난 사람들과는 달리 이 동네를 벗어날 마음이 없다. (박천현) |
기로 crossroads
극영화|컬러|16분|2024
DIRECTOR 황욱환
늦은 밤, 택일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동네 친구들과 캠핑하러 도시 변두리의 야영장으로 향한다. 캠핑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기타를 가져온 택일. 그간 관계가 소원했던 친구들과 만난다고 생각하니 문득, 처음 그들을 알았던 순간부터 기타리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했던 것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지금이 되도록 이룬 것 하나 없다. 야영장으로 향하는 택일.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자신의 형상을 한 존재에게 쫓기는 기이한 현상에 휘말린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 속 주인공 택일은 이름처럼 무언가를 ‘택일’ 해야 한다는 운명 혹은 압박감에 시달린다. 그러한 감정 상태는 택일이 경험하는 기이한 상황 그 자체로서 택일의 눈앞에 나타난다. 친구들과 캠핑장에서 나누는 일상적인 대화들은 친구들의 의도와는 달리 택일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지금 이 인물이 겪는 상황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지속적으로 겪어 온 것이라면 그것이 인물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지 나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가 외부적인 요인이 아니라 결국 자신 때문이라면 나 자신을 부숴야 한다. 결국 이름처럼 운명을 벗어나려면 매순간 ‘택일’ 해야 한다. 파괴적인 쇼가 끝난 뒤 찾아오는 감정이 공허함일지 편안함일지 선 택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가벼운 선택일지 모른다. (박천현) |
[경쟁3]
Gavi
극영화|컬러|29분|2024
DIRECTOR 김민근
호텔 청소부인 '가비'는 202호 방을 청소하다 팔찌를 줍는다. 이후 그는 팔찌의 주인인 '로페즈'와 대면하게 되고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프로그램 노트 보육원 출신인 가비는 호텔에 기거하며 객실 담당으로 일한다. 낯선 방문객들이 남긴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때로는 감추며 언제나 무결한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협박과 무시를 일삼는 사장에게 반항하거나 대드는 법 없이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할 뿐이다. 한편 가비는 줄곧 엄마의 소재를 찾고자 하지만 마음같이 쉽지 않고, 함께 일하는 페드로가 호텔을 뜰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며 그를 부추기지만 좀처럼 결정하기를 주저한다.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르지 않은 날들의 연속.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상황 속에 메여 있는 가비의 눈은 꺼내 못한 말들이 가라앉은 채 조용히 일렁인다. 어느 날, 분실물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한 객실에 머무는 여자와 가까워지며 묘한 감정을 느끼는 가비. 오지 않는 애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는 그는 그녀와 비밀을 공유하면서 점차 선의와 호의의 경계를 오간다. 개방적이면서 동시에 사적영역으로 변모하는 호텔이라는 공간이 갖는 장소성은 극의 서사와 호응하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항상 한 발 비켜선 채 상황을 주시하는 차분한 시선과 기약 없는 기다림을 버티고 선 이의 뒷모습이 인상 깊은 작품이다. (이남영) |
마네킹 The living doll
극영화|컬러|23분|2023
DIRECTOR 박서연
정체성이 없는 남자가 타인의 정체성을 훔치며 살아가는 이야기
프로그램 노트 오래된 슈퍼마켓에 젊은 남자인 태규가 일을 하고 있다. 처음부터 보여지는 이 공간성과 인물의 조합이 이질적이다. 태규는 영화 속 내내 3명의 손님을 만나고 그들을 관찰한다. 몰래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스케치를 한다. 이러한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태규가 알바생 혹은 배우, 작가, 살인자, 기자 등 태규가 누구인지 자유롭게 해석할 여지를 준다. 관객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태규가 누구인지를 결정한 뒤 영화를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은 금방 깨지게 된다. 여기서 관 객은 물론 태규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리고 3명의 손님들 또한 그럴 것이다. 모두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간다. 영화는 이러한 관객과의 줄다리기를 곳곳에서 시도한다. 장르적인 문법안에서도 흥미롭게 빗겨 나가는 이 줄다리기는 관객의 흥미를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박천현) |
일루전 ILLUSION
애니메이션|컬러|12분|2024
DIRECTOR 노영미
수미는 폐기된 스푼으로 플라스틱 전등을 만들고 있다. 그녀는 오래된 생각과 흘러간 인연을 떠올리다 세 가지 환상을 만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현재로부터 극심한 기후변화가 가속되었고 그로 인해 연쇄적인 대전환을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가상의 근미래, 지구는 해가 지는 찰나의 순간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선셋 루프’에 갇힌 채 시간의 축이 뒤틀린 행성이 되었다. 사방이 블라인드로 가려진 어느 어둑한 집 안, 한 때 유명배우였던 ‘수미’가 폐기된 플라스틱 스푼으로 전등을 만든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영화계를 떠나 환경운동가로서의 삶을 산 듯 하다. 그런 수미에게 과거 그녀가 출연해 명성을 샀던 영화의 재개봉 소식을 알리는 초대 메일이 도착하고 수미는 회상에 잠긴다. 불현듯 떠오른 달빛을 따라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미지 위로 19세기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가 쓴 동명의 시 ‘일루전’의 구절이 흐른다. 영화 |
[경쟁4]
나의 또 다른 세상 My another world
극영화|컬러|17분|2024
DIRECTOR 김소영
가수 이석훈의 팬이자 뇌병변장애가 있는 해리는 언젠가 혼자 바깥 세상으로 나가보는게 꿈이다. 어느날 보호자 없이 나가게 되는 해리는 여러 사람과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는 해리는 엄마에겐 언제나 보살핌이 필요한 딸이다. 일을 나간 엄마가 돌아오기 전까지 혼자 집에 있을 때가 많은 해리는 평소 좋아하는 가수의 존재로 그 시간을 채우곤 한다. 여느 때처럼 창밖을 내다보던 어느 날, 혼자 전동휠체어를 타고 유유히 길을 가는 낯선 사람을 보며 해리는 마음에 부는 바람을 느낀다. 영화는 해리의 방에서 시작해 거실, 아파트 입구를 지나 도심을 가로질러 경계지대까지 공간을 넓혀간다. 누군가에게는 친숙한 일상의 반경이지만, 보호자의 도움 없이 혼자 처음으로 밖을 나선 해리에겐 발이 닿는 곳마다 일상적이면서 동시에 비일상적인 공간으로서 마주하게 된다. <나의 또 다른 세상>은 해리와 해리가 만나며 관계 맺는 모든 대상들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담담히 지켜본다. 이는 영화가 일관되게 견지하는 태도이자, 세상의 모든 ‘해리’와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요청으로도 이해된다. 시작부에서 해리가 공들여 만들던 모자이크 안에는 삐뚤빼뚤 제멋대로 조각난 종이들이 한 곳에 어우러져 작품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 <나의 또 다른 세상>은 제가 가진 모양새를 그대로 인정하며, 서로 어깨를 겯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희망하고 긍정하는 영화다. (이남영) |
공간 속 기억 The Place We Lived In
다큐멘터리|컬러|18분|2024
DIRECTOR 박동규
“내 피난 갔을 때 12살 먹었거든 피난 갔다가 집에 오니 연기가 솔솔 나는 거라” 6 .25 전쟁이 끝나고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셨을 때. 집은 다 타버려 연기가 나고 있었다. 집을 복구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함께 집을 다시 지어가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70년. 시간이 흐르면서 집은 서서히 모습을 변해갔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 그동안, 집은 할아버지와 함께 자리를 지키며 가족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각자는 '집'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프로그램 노트 영화 속 화자들이 말하는 그 집은 화자들이 존재하기 전부터 집으로서 존재했을 것이다. 영화 속 나이가 가장 많은 할아버지의 증언 속에서 그 집은 한번 불탔었다. 불탄 그 집은 할아버지를 통 해서 다시 재건되었다. 그 가문의 집이 여기에 있다. 이 집에 대한 추억들이 영화 속 내내 다양한 화자를 통해서 증언된다. 그 증언들은 오래된 일일수록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이 생생하게 전해 진다. 오히려 화자들 중 어린 나이에 속한 사람들의 기억들이 일치하지 않는데 그래서 이 순간이 더욱 생경하게 다가온다. 집은 현재의 모습으로 촬영되었고 보여지지만 화자들이 말하는 기억들의 시간은 모두 다르다. 여기서 여러 시점들이 생성된다. 그러나 모두 현재의 집을 보고 있다. 화자들의 시점, 감독의 시점을 지나 영화의 시점은 관객인 나의 시점으로 이동한다. 영화 속 내가 가보지 않은 공간을 유심히 보다 보면 내가 실제로 가봤던 공간인 시골에 혼자 계신 할머니의 공 간으로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이동하게 된다. (박천현) |
49재 49-Day Ceremony
다큐멘터리|흑백|13분|2024
DIRECTOR 정시연
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49일이 지났다. 시연의 가족은 외할아버지의 집에 모여 제사를 준비하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프로그램 노트 소중한 이가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 되는 날, 남겨진 가족들이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들은 제사에 필요한 음식과 도구를 챙기고, 납골함을 정성껏 장식하고,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절을 올린다.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 의논의 장을 펼친다. 물건은 대부분 버려지지만, 이것이 고인 생전의 필요에 대한 평가절하가 아님을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아쉬움을 떨치려 모두가 온 힘을 다한 하루, 의례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자꾸만 분주해지는 몸짓들. 이것이 <49재>의 전부이고, 이런 영화를 닮아 죽음 이전의 삶과 오랜 사연은 덧없이 생략된다. 그런 한편, 이러한 풍경 속에 온전히 섞이지 않는 두 이미지가 눈에 밟힌다. 하나는 누구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아이가 죽음이란 사건 앞에서도 잃지 않는 천진한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상황 가운데 모든 것을 멀찍이 바라보는 노인의 짐짓 어색한 시선이다. 충격과 통곡으로 얼룩진 장면 없이, 일견 공백처럼 흘러가는 두 시간의 대비가 남기는 여운이 옅지 않다. 무엇보다 하루 끝자락에 홀로 남은 육체의 형상이 그 위로 내려앉은 어둠만큼 적적하다. (함윤정) |
모기는 파닥거리며 날지 않는다 Moskito Odyssey
극영화|컬러|14분|2024
DIRECTOR 이동현
함께 동거를 하는 연인인 기후와 수지는 여름 대낮에 자취방에서 섹스를 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모기가 나타나 그들을 방해한다. 무더운 날씨와 모기의 공격에 이들의 사이는 점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실내 온도 33도에 육박하는 한낮의 여름. 두 남녀가 고작 선풍기 바람에 의존한 채 누워있다. 여자는 책을 붙잡고 더위를 잊어보려 하는 반면,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자꾸만 성가시게 달라붙는다. 이에 짜증을 숨기지 않는 여자이지만, 들끓는 청춘답게 이내 ‘미친 날씨’를 극복하고 사랑의 행위에 빠져드는 두 사람이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들의 귓가에 충격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가공할 만한 날개짓과 함께 흡혈을 예고하는 모기의 것임에 틀림 없다. 이렇게나 하찮고도 중대한 문제적 상황 앞에서 남녀는 어쩔 수 없이 잠시 물러선다. 그러나 이런 순간마다 유난히 수려해지는 남자의 언변에 여자의 마음은 도로 넘어가고, 이들은 다시 서로에게 가까워진다. 그런데 달콤한 몰입의 한가운데 또 한번 용감하게 침투한 모기 소리에 분위기가 전보다 더 살벌해진다. 어쩌다 불을 지핀 실내 치정극은 끝내 가볍지 않은 폭력의 연쇄로 번지는데. 이렇게 불쾌와 유쾌를 넘나드는 두 남녀의 소동은, 아니 두 사람과 한 모기의 활극은 어떤 결말을 맞을까? (함윤정) |
[경쟁5]
(테크노) 사랑해! Love ya! (Techno)
다큐멘터리|컬러|55분|2024
DIRECTOR 손희완
테크노에 몸을 맡겨 춤을 추는 사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공기, 무아, 해방의 영역을 시각적인 이미지와 청각적인 쾌감을 통해 하나의 탈출구 혹은 해방을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테크노가 주는 자유로움을 통해 그 속의 숨겨진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공유하여 잃어버린 ‘우리’ 가 되는 여정을 여러 증언들을 통해 그려내본다.
프로그램 노트 테크노에 대한 정의나 통념 같은 사회적 합의의 언어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 영화의 방점은 ‘문화’로서의 음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랑’의 외침을 듣는 데 찍히기 때문이다. 테크노와의 만남, 그 충격과 환희의 경험부터 기억 속에서 역류하는 슬픔까지.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를 이들이 각자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는 동안 카메라는 그들의 언어가 도달하지 못한 감정의 공백을 메운다. 여기까진 괄호와 느낌표 사이 단정한 시선을 견지하는 다큐멘터리 같이 들리겠지만, 이것이 <(테크노) 사랑해!>의 전부는 아니고 그래서 흥미롭다. 전작 <아웃풋>(2022)과 <범솔>(2023)에 이어 더욱 호기로워진 감독만의 표현적 이미지가 다큐멘터리에 독창적인 레이어를 더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어둡고 혼란한 채 반복되는 음율이 파멸을 향한 잠수가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는 동력일 수 있음을 알아차릴 때, 그 낯선 생동성과 삶이란 양태의 닮음을 느끼는 순간, 영화는 스크린 너머로 작은 실패를 요청한다. 수줍지만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한 이들처럼 자기만의 테크노를 외쳐보라고. 그것이 무엇이든 둠칫대는 리듬 속에 숨쉴 수 있다면, 가끔은 길바닥에 머리를 처박아도 아무렴 상관 없다고. (함윤정) |
[경쟁6]
밤의 유령 Night ghosts
다큐멘터리|컬러|60분|2023
DIRECTOR 이창우
대리운전 콜을 잡는 전쟁을 치르며 휴대폰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대리운전 기사들의 현실과 진상고객에게 듣는 모욕적인 욕설까지 묵묵히 감내하며 목적지까지 차를 몰아야 하는 여성대리기사들의 시린 삶의 현장이 가감없이 펼쳐진다. 한 건이라도 콜을 더 타기 위해 새벽까지 자신을 혹사해야 하는 이들도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다. 대리기사들의 상호부조 조직인 ‘카부기공제회’에 가입하면서 같은 일을 하는 언니,동생을 알게 되었고 이들이 서로 애환을 나누며 심야화장실 찾기 앱도 만들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대리운전 기사를 돕기 위해 십시일반하는 공동체도 키워나간다. 현실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하루하루 성실히 살아가는 여성대리기사들의 잡초같은 생명력도 만만치 않다.
프로그램 노트 매일같이 밤의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처에 있지만 좀체 보이지 않아서 스스로를 ‘밤의 유령’이라 칭하는 이들의 직업은 대리운전수다. 잘 보이지 않는다는 영화 속 인물의 말을 그대로 옮겨봤지만, ‘콜’에 웃고 ‘콜’에 우는 이들을 실생활에서 만나기가 대단히 어려운가 생각해보면 꼭 그렇진 않다. 다만 <밤의 유령>은 그간 우리가 자세히 보거나 들으려하지 않았던 여성 대리운전수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그로 인한 고초를 보여줌으로써 그 ‘볼 수 없음’의 속뜻에 한 발짝 다가가게 한다. 바디캠에 고스란히 담긴 심야의 행로에 시선을 겹치다보면 노동의 현장에 도사리는 비상식적 폭력에 덩달아 분개하지 않을 수 없지만, 거친 호흡으로 전해지는 실제 상황을 단순히 극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단 점이 이 다큐멘터리를 감동적인 시선으로 보게 한다. 서로 연대하는 공동체 내부의 움직임과 그런 이들에게 건네지는 따스한 손길을 목격하면서, 우리는 이들의 유령성이 실로 어디서부터 규정되었는지 되묻는다. (함윤정) |
스펙트럼 부산 - 나우
[비경쟁]
바다의 자매 Sisters of the sea
다큐멘터리|컬러|10분|2024
DIRECTOR 자이메나 자렝바
이 여성들은 평생을 바다에서 일하며 보냈다. 이 영화에서 그들은 세월이 흐르며 바다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리고 그들의 일터인 바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회상한다.
프로그램 노트 <바다의 자매>는 부산 영도 해녀촌 전경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우직하게 들리는 해녀들의 내레이션, 오묘한 배경 음악, 섬세하게 포착되는 해녀들의 행위, 천연덕스럽게 담기는 해양 생물, 푸른빛이 감도는 날카로운 화면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은 관객을 간소하고 낯선 세계로 유인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낯익고 친숙했던 해녀의 이미지는 금세 생경한 테를 두르고 특별한 심상으로 거듭난다. “나이 들어서까지 해녀로 일하는 할머니들이 대단해 보였어요. 제가 사는 폴란드에서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거든요.” 제8회 부산 인터시티 영화제, 자이메나 자렝바 감독이 소재 선택에 대한 질문을 듣고 위와 같이 답했다. 그 대답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바는 그녀에게 해녀란 존재가 고결하고 거룩한 실재로 다가왔을 거란 점이다. 자이메나 감독은 진귀한 이미지 조각들을 조합해서 자신이 기대한 인상을 영화에 가감 없이 투영한다. 여기서 약간의 아쉬움도 생긴다.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해녀들을 보다 가까이서 바라봤다면, 영화는 다른 궤를 그리며 독특함 이상의 울림을 가지지 않았을까. 물론 대상과의 거리가 먼 대로 근사한 지점도 분명 있지만 말이다. (윤지혜) |
할아버지가 떠난 뒤 After my Grandpa
다큐멘터리|컬러|18분|2024
DIRECTOR 에브루 아브치
에브루의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여러 해가 지난 뒤, 그의 손녀는 할아버지가 한국에서 처음 도착한 도시 부산에서의 이야기를 전한다.
프로그램 노트 우리는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고, 궁금한 정보는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무한 연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로 인한 지나친 편리성은 사람들의 연결 감각을 무디게 만든다. 하지만 어떤 매개체의 발견은 뜻밖의 연결점을 제시하며 혹자가 생생한 결속의 순간을 무량으로 느끼게 한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에서 숟가락과 포크가 그런 매체로 작용한다. 에브루 아브치 감독의 할아버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부산으로 온 튀르키예 군인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보급품으로 받은 미제 숟가락과 포크를 가족 선물 겸 기념품으로 챙겨 고향으로 돌아갔다. 튀르키예에 있는 그의 가족은 거의 70년간 그 기물을 식사 시간에 사용해 왔다. 그리고 프로젝트 작업을 위해 부산으로 온 에브루 아브치 감독은 박물관에 해당 기물이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어떻게 보면 한 나라의 역사를 함의하는 물품이 그녀와 그녀 가족의 일상 중에 무던히 쓰이고 있었던 셈이다. 감독은 숟가락과 포크를 매개 삼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그가 해준 얘기들을 복기하고, 한반도의 뼈아픈 역사에 대해 돌아본다. <할아버지가 떠난 뒤>는 여러 면에서 단출하고, 선명하고, 영리한 영화다. (윤지혜) |
미조 MIJO
다큐멘터리|컬러|23분|2024
DIRECTOR 신나리
섬을 돌면서 섬의 풍광과 함께 하나둘씩 섬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섬을 지키는 사람들, 섬을 나간 사람들, 섬에 들어온 사람들. 그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보면 볼수록 결국 추도라는 섬을 향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 과정을 통해 섬에 오기 전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는 우연스레 만난 섬의 인연들로 엮어져 갯냄새 느껴지는 섬이 되고 섬사람이 되어 다시 탄생한다.
프로그램 노트 통영항에서 오가는 뱃길이 하루 두 번 열리는 섬. 추도의 가장 서쪽에 자리 잡은 마을, 미조가 있다. 감독은 추도에 얼마간 머무르면서 섬사람들의 일상을 담았다. 자연스레 카메라는 이들을 차분히 뒤따르며 성실하게 좇는다. 찬거리와 생필품을 사기 위해 뭍으로 나온 어머니, 돌아가는 배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사람들, 물가에서 해루질하는 사람, 들판에서 나물 캐는 사람, 그리고 회복이 필요한 이를 위해 따뜻한 아랫목을 내어준 아저씨의 면면이 모여 추도에 대한 인상을 점진적으로 완성시켜 나간다. 섬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풍경을 단일한 이야기로 엮지 않은 이 영화는 때론 촬영 중인 스태프의 모습마저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한 때 어느 시점에 우연으로든 어떤 필연에 따라서든 추도라는 공간에 함께 머물렀던 모든 이들을 아울러 살피려는 고운 시선을 영화 곳곳에서 느낄 수 있길 바란다. (이남영) |
빛과 열: 부산 남구 유엔평화로 Light and Heat: UN Peace Road, Nam-gu, Busan
다큐멘터리|컬러|23분|2024
DIRECTOR 오승진
한 남자가 유엔평화로를 걸어간다. 만화도 그린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는 ‘빛과 열’이라는 주제로 부산 지역의 물성을 탐구하고 있는 오승진의 신작이다. 연작의 세 번째 작품인 이 영화는 신원이 명확한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과 그의 개인사가 얼마간 드러난다는 점에서, 완연한 에세이 필름에 가까웠던 지난 작품들에 비해 다큐멘터리적 요소가 강화되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부산의 만화가 남정훈으로, 주로 피란수도 부산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다. 피란수도의 흔적을 좇는 남정훈의 드로잉과 카메라로 유엔평화로를 포착하는 오승진의 숏은 양자가 서로 매개하며 이 공간의 빛과 열을 드러내고 있다. 유엔평화로라는 독특한 역사와 이름을 가진 공간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예술 장르를 경유한 뒤 스크린 위에 중첩될 때, 관객은 전쟁터가 되는 것은 피했으나, 전쟁이 남긴 혼란은 뚜렷이 새겨진 부산이라는 지역의 낯섦을 체험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성동욱) |
구름이하는말 Spring Equinox
극영화|컬러|81분|2024
DIRECTOR 장태구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현수와선희'의 공연을 통해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묘한 영향을 받게 되면서 시는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된다.
프로그램 노트 도시 장송곡으로서의 <구름이하는말>은 손에 한 줌의 희망을 쥐고 세상의 거대한 죽음을 수용하는 영화적 자세를 보인다. 원체 근대 서구의 영화란 산업혁명으로 급변한 도시의 빠른 속도감에 자신의 속도를 맞출 수 있는 동시대적 매체였다. 이후 너무 빨라진 세상의 속도에 반기를 들며 나타난 슬로우 시네마는 영화를 현실에 거스르는 대안적 매체로 상정했다. 그리고 2024년에 만들어진 <구름이하는말>은 영화의 속도를 당장 우리가 느끼는(느끼고자 하는) 현실의 속도에 맞춘다. 그 프레임 속엔 점차 죽어가는 작금 대한민국 부산이란 도시의 풍광이 있다. 여기엔 카페이자 문화공간을 겸하는 한 공간이 있고, 그곳에 젊은 가수나 사진가 등 여러 청년이 모인다. 이들은 거창하고 열혈 넘치는 목표로 움직이기보단 하루하루의 먹고 살기와 적절한 규모의 창작 지속을 꿈꾸며 살고 있다. 여하간 사람이란 천천히 죽어가기 마련이고, 사람이 모여 만든 도시 역시 그 종말을 향해 사라져가는 생애 주기를 지닌다. 다만 그 속도감만큼은 영화가 조절할 수 있다.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지 않게, 근대 서구의 산만한 영화도 아니고 21세기 근처의 슬로우 시네마도 아닌 ‘지금의 우리’가 주도하는 속도에 맞추어 서로가 손을 잡고 솔직하게 나아가는 이 영화의 태도는 미덥기 그지없다. (이우빈) |
산산조각 난 해 Letters from the Shattered Years
다큐멘터리|혼합|90분|2024
DIRECTOR 오민욱
밀봉된 과거를 열어 미래로 향하는 시간을 잠시나마 붙잡아두며
프로그램 노트 2023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작품 <마모>로부터 확장된 <산산조각 난 해>에 흐르는 이미지들은 오민욱의 일상과 사건, 영화, 혹은 영화가 되지 못한 잉여들의 아카이브다. <해협>(2019), <유령의 해>(2022)로 이르는 동안의 시간 위로, <해협> 이후 함께 <새로운 해>를 만들기로 했던 샤오 카이츠의 목소리가 편지를 낭독한다. 오민욱의 결혼을 축하하는 편지, 그에 대한 답장, 그리고 오민욱이 갓 태어난 조카에게 쓴 편지. 사진과 영상은 때로는 그 구분이 무색해 보일 만큼 느리게 움직인다. 뒤로, 혹은 앞으로. 맥락을 알 수 없거나, 거칠거나, 의도적으로 흐리게 처리해 형상을 알아보기 어렵거나, 단속적으로 밀리며 변형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산산조각이고, 기억과 의식에서 꺼내온 편린처럼 명료한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를 떠올리며 제목을 '산산조각 난 (새로운) 해'로 읽고 애상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좌절, 고통, 슬픔 같은 것에 침잠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건 영화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했기 때문인 것 같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정호승의 시다. (김지연) |
뭐 그런 거지 So it goes
극영화|컬러|76분|2024
DIRECTOR 이하람
머물 곳 없는 어느 부부는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살인을 한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란 게 뭐 겨우 이런 거지. <뭐 그런 거지>는 일부러, 감독 자신에 상황에 맞춰, 의도적으로 영화의 가치를 격하한다. 여기서 격하란 부정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거대한 틀에 묶여 자신의 정체를 잃어버린 영화 매체의 현재를 적절한 위치에 옮겨 놓으려는 착한 조정에 가깝다. 영화의 모든 요소는 최대한으로 경량화되어 샅샅이 흩뿌려져 있다. 로드 무비의 형식 아래 한 남녀가 자경단 역할을 자청하며 나쁜 사람들을 붙잡아 처벌하는데 알고 보니 남녀는 우주 바깥에서 온 외계인이고··· 아무튼 뭐 그렇다. 어떠한 맥락을 붙잡을 수 없는 이야기와 장르의 산개를 휘어잡는 힘은 이하람 감독이 전작 <기행>(2022), <흙으로 돌아가리라>(2023)에서 드러냈던 (실질적) 1인 제작 영화의 품질적인 균일함이다. 이 균일함은 명백히 로-파이하고 전혀 고급스럽지 않아 빈곤한 이미지, 사운드, 그리고 인물마다 극적으로 경직되고 과장되어 튀는 연기의 연속이다. 결국 영화란 것은 이런 일이다. 머릿속에 있는 온갖 이야기와 상상을 이렇게 저렇게라도 화면에 꺼내어 보여주는, 말 그대로의 순수한 창작이어야 한다. <뭐 그런 거지>는 작금 영화에 씌워진 겉치레를 벗어 던지고 한 작가의 나체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낭만의 표면이다. (이우빈) |
수영제과 SUYEONG BAKERY
극영화|컬러|95분|2024
DIRECTOR 정성욱
모 제과 제빵 대기업의 인턴 면접에서 떨어진 초보 파티시에 소화는 부산으로 낙향한다. 부산 수영의 동네 빵집 수영제과를 망하게 하고 그곳에 마리호텔과 김마리 베이커리를 오픈하려는 프로젝트에 소화를 위장 취업시키는 유명 파티시에 김마리. 평소 동경하던 유명 파티시에 김마리의 온갖 회유에 따라 소화는 수영제과를 망하게 하려 기괴한 사건들을 기획하지만,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오히려 이 동네 빵집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최고의 파티셰를 꿈꾸는 소화는 제과제빵 대기업 인턴 면접에서 낙방하고 부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동네빵집 ‘수영제과’를 운영하는 강두의 도움으로 소화는 자신이 파티셰의 꿈을 키웠던 곳에서 다시 일하며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간다. 한편, 소화의 롤모델이자 유명 파티셰인 사업가 김마리는 수영제과를 몰아낸 뒤 그 자리에 호텔을 세울 계책을 갖고 본격적으로 소화를 이용한다. 김마리의 약속을 철썩같이 믿고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는 소화는 나름대로 수영제과를 망하게 만들어 버릴 작전을 꾸미지만 의도와는 달리 매번 일이 꼬여 버리고 수영제과는 점점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개의치 않고 수영제과를 압박해오는 김마리의 방해에 힘들어하는 강두를 보며 괴로운 소화. 끝내 소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지켜낼 수 있을까? 영화 <수영제과>는 자본과 힘에 밀려나고 지워지는 지역의 가치를 지키려 분투하는 이웃들의 모습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또한, 실제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빵집을 비롯하여 시민에게 사랑받는 일상의 공간들을 따뜻하고 정감있게 담아내며, 그동안 소리 없이 사라졌던 골목과 동네의 정겨운 풍경들과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온기가 한가득 느껴지는 영화다. (이남영) |
천국 PARADISE
극영화|컬러|95분|2024
DIRECTOR 손슨웅
한명이 죽어야 한명이 살 수 있는 '샴 쌍둥이'처럼, 쌍둥이 형제 '일도'와 '이도'는 서로의 인생을 빼앗고 차지하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그보단 먼저, 이들 형제의 목숨을 노리는 악인들로부터 힘을 합쳐 살아남아야 한다.
프로그램 노트 마치 카인과 아벨의 비극적 운명처럼 쌍둥이 형제 일도와 이도는 둘 중 한 명이 죽어야 한단 현실적 곤궁에 처한다. 장기 매매를 일삼는 폭력 조직에 두 형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타국에서 온 초현실적 킬러가 그들을 쫓는다. 이 와중에 자신들을 키운 조직의 보스와 부모님 간의 전사가 무척이나 복잡하게 꼬여 있음을 점차 깨닫는다. 삶의 끝이란 절벽에 형과 동생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선택지로 갈 것인가. 이에 <천국>은 필름 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을 적절히 빌려 결국 모든 선택의 끝에 파멸만이 남아 있을 것 같은 비극의 정조를 이끈다. 그러나 어떠한 답도 없는 것 같은 이 난제에서 영화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지옥 같은 현실을 아예 거꾸로 뒤집어 바라보자고, 우리가 힘써 그렇게 만들자고 말하듯 <천국>은 종종 프레임의 상하를 완전히 반전시키는 형식의 미를 취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영화는 부산이란 도시성의 활력을 고스란히 담아낸 항구 도시의 비릿한 동세와 말투의 강세를 통해 적절하게 경쾌한 톤 앤 매너의 조절에도 성공한다. (이우빈) |
파동(波冬) The Waves Of Winter
극영화|컬러|114분|2024
DIRECTOR 이한주
서울에서 철도 기관사로 일하는 문영. 기관사로서 목격하게 되는 사고사와 자신도 모르게 커져버린 삶의 무력감으로 인해 하루하루 삶을 버텨내고 있다. 어느 날 고향 친구 종현으로부터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게 되고 그동안 잊으려 노력해왔던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상우가 있다. 상우 역시 문영을 따라 뒤늦은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기억의 조각들은 존재와 부재 사이를 부유하다 제각기 자리를 찾아간다. 다만 그렇게 정리되기까지 긴 방황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극중 기관사인 문영은 철도 사고사 목격으로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환영 속에 나타나는 것은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기찻길 위를 뛰어가는 어린 문영의 뒷모습이다. 소싯적 기억은 이미 다 커버린 문영을 은밀히 불러들인다. 힘겹게 발버둥 치는 그녀를 불꽃처럼 반짝였던 순간으로 유인한다. 마침내 문영은 잊고 있던 고향에 내려간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엔 옛 친구들과 추억 어린 공간이 그대로 있다. 아니, 모든 것들이 여전한 듯 다르게, 조금씩 변해있다. 문영은 끈덕지게 과거의 기억을 탐구하고, 심문한다. 그녀의 남편 상우는 급작스럽게 떠난 문영을 쫓는다. 기억 속에 숨은 문영을 찾기 위해 아내의 과거를 아등바등 추적한다. 갖은 노력 끝에 어린 시절 문영과 맞닥뜨리는 상우. 하지만 문영의 존재는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다. 흐릿하고 모호하다. <파동(波冬)>은 기억의 교차로에서 헤매는 인물들을 담고,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도망가고, 뒤쫓고, 숨고, 찾아내려 애쓰는 이들의 몸부림을. 극의 끝에선 시공간을 넘나드는 치환의 순간 또한 목격할 수 있다. (윤지혜) |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 Spring Wind Project 2 : Meet comrades again
다큐멘터리|컬러|DCP|87분|2024
DIRECTOR 김환태
2022년, ‘봄바람 순례단’의 여정을 기록한 봄바람 프로젝트. 2024년, 윤석열 정부의 퇴행적 시간을 마주하며 다시 한번 현장을 잇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공동의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프로그램노트 “우리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다 이어져 있잖아요. 그래서 그 어떤 투쟁이든 나의 투쟁이란 생각이 어느 날부터 들게 되면서···.” 삶은 투쟁이다. 그리고 삶은 함께하는 것이다.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는 총 11개의 단편 다큐멘터리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로 함께하는 투쟁의 필요를 피력한다. 기후 위기, 장애인 교육권, 이주노동자 인권, 대안적 사회 공동체 구현, 새터민 권리 등의 사회적이고 거시적이며, 필시 보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문제에 열렬히 부딪히는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더하여 2014년 밀양 송전탑 투쟁, 가덕도 신공항과 제주 제2공항 건설, 뉴라이트가 종용하는 사상 전쟁의 심화 그리고 이태원 참사까지 지금 대한민국이 마주하여 투쟁해야 할 구체적인 사건들까지 넓게 다뤄진다. 이처럼 수많은 어려움과 지난한 사례들을 영화와 카메라가 모두 해결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말 그대로 매체, 무언가와 무언가를 매개하는 지대다. 11편의 작품을 통해 그 속의 투쟁과 관객이 미약하게나마 연결될 수 있다면 영화는 그 소임을 다한 셈이며, 여기서 관객의 몫 역시 적극적으로 그 연결의 주체가 되는 일일 테다. (이우빈) |
스펙트럼 부산 - 리와인드
[비경쟁]
표류 The Drift
극영화|컬러|9분|1996
DIRECTOR 유상곤
한 남자가 망망대해의 위태로운 뗏목 위에 표류하고 있다. 그런 그의 곁을 또 다른 표류자와 기관배가 스쳐가 버리고, 그는 서서히 반복되는 절망에 익숙해진다. 막상 그의 곁으로 빈사상태의 늙은이가 떠내려오자 외면한 채 자신의 뗏목으로부터 슬그머니 밀어내고 그는 또다시 홀로 표류한다.
프로그램 노트 삶이란 세상을 표류하는 일일 것이다. 얼마간의 의지와 우연, 혹은 운명이라 불릴 만한 것들을 따라 흘러가니 내 것이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이 문장이 사족인 것만 같아 머뭇거려질만큼 <표류>는 명료한 은유의 영화다. 이후에도 유상곤이 지속적으로 다루어온 고독, 유폐, 단절의 형상을 한 인간관계의 원형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한 현재의 관객으로 접할 수 있는 그의 시작이자 1990년대 부산독립영화를 주목하게 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망망대해 위로 쏟아지는 직사광선을 피할 도리도 없고 돛도 닻도 없이 가랑잎처럼 떠 있는 뗏목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불안한 존재인가. 그 근처를 스쳐 가는 이들이 있다. 세상사 그러하듯 바다를 떠다닌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가 같은 상황이지만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 누군가는 위험천만한 튜브 하나 달랑 끼고도 유유자적하는데 누군가는 선박에 몸을 싣고 지나가면서 이 표류자를 도와줄 의향이 없다. 단출한 구성만으로도 우리 삶의 일부를 탁월하게 그려내는 그의 미덕은 시간 앞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다. (김지연) |
길목 Way Entrance
극영화|컬러|18분|1997
DIRECTOR 유상곤
한적한 어촌의 겨울밤, 철길 건널목 허름한 가게 앞에서 젊은 여자가 신호음만 들려오는 수화기를 들고 있다. 그녀가 가자 가게 안의 늙은 여자가 나와 전화를 떼 내어 들어간다. 가게의 불이 꺼진다. 가게 주위에서 일어나는 늙은 여자의 일상. 한복집 재봉틀 앞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의 일상. 퇴근길 젊은 여자는 가게 앞을 지나가다 전화를 건다. 여전히 신호음만 들려 온다. 밤늦은 기차가 지나가고 가게를 나온 늙은 여자가 전화를 떼 내어 가게로 들어간다. 가게 불이 꺼진다.
프로그램 노트 유상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일상을 스크린에 옮겨온다. 거기엔 삶의 골수로부터 채취한 농밀한 감정이 배어 나와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 없고 무표정한 인물들은 오늘도 우리가 거리에서 스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처럼 평범하다. 어렵지 않게 파악되는 두 인물의 단조로운 삶은 철길 앞 슈퍼마켓에서 교차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시놉시스에 있는 단순한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그걸 이 영화의 전부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디제시스 공간의 정적은 그들의 내면과 같고, 짐짓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세심한 관찰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영화가 관객을 데려다 주는 곳은 어딜까. 겨울, 사위는 이미 어둡고 슈퍼마켓의 작은 불빛마저 꺼진 뒤 완전히 어둠에 잠기는 세상을 목격할 때, 그 순간 가슴속에 밀려드는 감정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은지. 고독, 스산함, 외로움, 슬픔, 아픔. 그런데도 기다리거나 견뎌내는 마음의 담담함, 그리고 어느 정도의 체념에 관하여. (김지연) |
체온 The Body Temperature
극영화|컬러|8분|1998
DIRECTOR 유상곤
노인은 정신나간 딸을 오토바이에 태운 채 한적한 길을 달린다. 갑작스레 소낙비가 내리고 그들은 운동장 옆 처마에서 비를 피한다. 노인은 딸의 젖은 머리를 닦고, 물을 먹여주고는 돌아서서 비 오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깊은 회한에 젖는다.
프로그램 노트 이미지도 말을 한다. 유상곤은 그걸 안다. 그는 특정한 스타일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미지의 연쇄로 추동하며 영화를 영화이게 만드는 그의 작업은 비평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군더더기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간결한 형식 안에는 삶의 보편성이 높은 밀도로 응결돼 있다. 다시 말해 관객은 이들 부녀가 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삶이 녹록하지 않을 것을 안다. 우리는 노인이 헬멧을 쓰지 않은 이유를 알 순 없어도 그가 딸을 지극하게 돌본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다. 건조한 관조자의 시선으로 생의 고단함, 슬픔, 연민을 응시하는 영화 앞에서 감정의 파고에 휩싸이는 관객이 된다는 말이다. (김지연) |
이른 여름, 슈퍼맨 Superman in Early Summer
극영화|컬러|14분|2001
DIRECTOR 유상곤
이른 여름 아침, 버스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던 소녀는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것을 눈여겨 본다. 버스 안의 승객들이 모두 잠이 든 순간, 소녀는 예의 그 아저씨가 하늘을 나는 슈퍼맨이 되어 나타나는 환상을 경험한다.
프로그램 노트 이 작품은 일면 유상곤의 일탈처럼 보인다. 생이 고독하거나 고단하지 않은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판타지를 끌어들여 그의 영화이력에서 확실히 다른 접근이다. 그렇지만 삶의 범주 안에 생성되는 순간들을 포획해 어떤 인상과 정서를 전할 때에도, 유상곤은 기꺼이 특정 시간 혹은 사건을 늘리거나 생략하며 그 와중에 사실성을 종종 무시했다. 그러니 어쩌면 그의 선택에 놀라지 않은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어느 쪽이든 <이른 여름, 슈퍼맨>이 예쁜 동화가 되려고 시도한다는 덴 동의할 것이다. 동그란 눈을 한 어린이 주인공을 귀여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아빠에게 가는 버스에서 슈퍼맨을 만난다는 영화의 발상은 천진하다. 무성영화 시대의 슬랩스틱이 소환되고 아기자기한 판타지 장면들이 펼쳐진다. 영화는 한 점 그늘 없이 밝다. 순간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런 것들이 위로가 되는 때가 있다. (김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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