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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27회 부산독립영화제
  • 작성자 관리자
  • 조회수 1152
2025-12-04 14:23:46

 

2025 제27회 부산독립영화제
 

일시 l 2025. 11. 20. ~ 11. 24.

장소 l 영화의전당, 무사이 극장

 


개막작

한 번만 더 Just one more time

 

극영화|흑백|39분|2025

 

DIRECTOR 소유현

 

꼭 한번 보고 싶은 순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실. 그곳에서 희윤은 대본을 쓰고, 지아는 연기를 한다.

 

 

프로그램 노트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한, 하면 안 되는데 해버린, 해야 하는 말 혹은 일들. 무엇이건 과거형으로 남겨두지 못해 지속되는 것들이 현재의 나를 이룬다. <한 번만 더>의 인물들과 우리는 그 미완의 시간을 살아가는 범속한 존재들이다. 영화에 흐르는 말과 글, 이미지들은 표면일 뿐 그 심연을 헤아리는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다. 얼마 간은 꾸며내고 또 얼마간은 사실일 말들. 영화가 그렇듯이. 이를테면 지아의 발화는 종종 희윤이 쓴 대본을 읽는 건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인지 그저 상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대화 또한 사담, 상담, 역할극의 경계를 오가고는 한다. 설명적인 숏을 배제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상담자와 내담자가 앉은 자리, 또는 발언의 주체를 바꾸면서 모호함을 의도한 결과다. 두 사람의 대화를 포착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인 오버 더 숄더 숏 대신에 얼굴과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연쇄되는 숏들이 자아내는 리듬도 나는 좋다고 말해야겠다. 영화는 인물의 기억과 생각,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 다시 말해 말과 이야기로 쌓아 올린 세계다. 그로 인해 평범한 상담실은 돌아올 수 없는 시간, 혹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이 펼쳐져 시공을 초월한 공간처럼 보이고, 쓸쓸한 내면의 풍경처럼 빈 정류장과 버스, 도시의 밤이 주는 정취가 아름답다고도 말해야겠다. 스스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영화를 긴 문장으로 좇는 이 아이러니도 영화를 사랑하는 법들 중의 하나일 테니까. (김지연)

 

폐막작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Closer than they appear

 

극영화|컬러|12분|2025

 

DIRECTOR 신은주

 

민지는 보기 싫은 자신을 떼어내 묻었다. 다시 가 보니 그 자리엔 무가 묻혀 있다.

 

 

 

프로그램 노트

사이드미러에 주로 씌어있는 안내 문구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은 영화 속 나와 무의 관계,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를 드러내는 조건으로서의 부재, 혹은 존재와 부재의 긴장 관계쯤 될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나’를 숲에다 묻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숲을 찾았을 때, 묻어버린 ‘나’의 자리에는 무가 남아있고, 그것을 옮겨 심었다가 국을 끓인다. 내레이션은 그것을 나라고도, 너라고도 칭하지만, 결국에 나는 나, 또는 무를 먹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지시하는 무란 채소로 형상화되어 있으나 누구든 무(無)의 동음이의어로 작동한다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을 표상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의 달빛 0장」이 나지막한 내레이션의 일부로 활용되면서 영화는 인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 혹은 정체성을 성찰하는 짤막한 에세이 필름으로 감각적인 탐구를 시도해 보려고도 한다. (김지연)

 

유령 Haunt

 

다큐멘터리|컬러|28분|2025

 

DIRECTOR 임지훈

 

한 사내가 사라졌다. 내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과거에 그가 살았던 곳의 주소뿐이다. 점차 지워지고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가 살았던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사람과 집을 마주한다.

 

 

프로그램 노트

사내가 사라진 후, 거주 불명자의 것이 된 주민등록초본과 언젠가 그와 함께 찍은 사진만이 남았다. 흔적처럼 남은 것들은 존재에 대한 증거이자 부재를 가리키는 지표이기도 하다. <유령>은 이처럼 흔적이 품고 있는 양편의 의미를 익히 아는 이가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초본을 지도 삼아 사내가 살던 동네를 배회하는 걸음과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몸짓에 서두름이 없는 이유는 이토록 느지막한 당도에 걸어볼 만한 기대의 크기를 연출자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고 흔적에 다가갈수록 존재는 불투명하게 감각되고, 생사에 대한 예감의 추 또한 죽음을 향해 기울어진다. 그렇게 어수룩한 생생함과 정제된 흐릿함으로 장면화된 현재가 잇따르다, 어떤 만남을 기점으로 카메라는 사라진 사내와의 접점에 성큼 다가선다. 꿈결 같던 현재 속에 과거의 사정과 미래의 약속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부터다. 결국 사내는 어떤 존재로 기록되고 또 기억될까.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부재를 경유해 또 다른 삶의 안녕을 묻는 <유령>의 화법이 산 자보다 유령을 부르는 의식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함윤정)

 

물질형태 The Form of Matter

 

다큐멘터리|컬러|15분|2024

 

DIRECTOR 이성욱

 

‘시락’은 공연의 음성 해설 작성을 위해 배우들과 함께 연습에 참여한다.

 

 

 

프로그램 노트

두 존재의 층위가 겹쳐진다. 유리 수조 안에서 대사 없이 효과음에만 의지해 퍼포먼스를 펼치는 연기자들과, 이들이 일일이 언어로 설명하여 물속 퍼포먼스에 함께 참여시키는 시각 장애인 연기자.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무 안일하다. 존재의 형태와 환경은 너무도 다양해 지금 내가 어느 층위에 존재하는 누구인지 사실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리가 사라지는 물속의 세상일 수도 있지만 유리창 벽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무음의 공기 수조 속에 떠다니고 있기도 하다. 눈과 이미지는 탐욕스럽다.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감각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각 장애인을 클로즈업할 때 이 존재를 진정으로 포착하기를 갈망하며 다가간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이유는 이 진지하고 순수한 화자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차들의 소음 속에 들리는 파도와 벌레와 새들의 소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젖혀 귀를 기울이는 그의 말들은 과연 나의 감각은 세상을 진실되게 마주하는지 의심해 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좀 더 귀를 열고 눈을 감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그가 말할 때 세상을 활짝 연 감각으로 껴안아야 함을 느끼며 오히려 눈을 감고 싶어진다. 그때 카메라는 그의 귀를 바라보며 온갖 소리들의 세상에 집중하는 그를 촉각 한다. (여설란)

 


수상결과

시상내역수상작
대상<물질형태> (2024) 이성욱
심사위원특별상<유령> (2025) 임지훈 
최우수연기상<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2025) 김지윤
기술창의상<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2025) 정세명
관객심사단상<유령> (2025) 임지훈
부산독립영화협회상<벌레들> (2025) 이하람

 


제27회 부산독립영화제 포스터

 

 

 


제27회 부산 독립영화제 트레일러

 


메이드 인 부산

 

[경쟁1]

사이먼 SIMON

 

다큐멘터리|컬러|30분|2025

 

DIRECTOR 김진국, 이영봉

 

다큐멘터리 <사이먼>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레이싱 슈트를 만들어온 장인, 송영식의 이야기이다. 레이싱 슈트는 단순한 유니폼이 아닌 생명을 지키는 필수 장비로, 제작 과정에서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며 대한민국에서 이 작업을 맡아온 곳은 오직 '사이먼'뿐이다. 그는 대한민국 레이싱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레이싱 맞춤 슈트를 제작해 온 유일한 인물이지만, 어느새 그의 나이는 일흔을 훌쩍 넘었고, 그를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에 더 이상 이 슈트를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사이먼이 직접 제작한 레이싱 슈트를 입고 경주에 나선 선수들과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작업이 어떻게 많은 이들의 꿈과 성과에 기여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프로그램 노트

소재의 유일무이함은 영화 창작자가 열렬히 탐내는 요소 중 하나다. 인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경우엔 더욱 그럴 것이다. <사이먼>은 국내에 한 명뿐인 수제 레이싱 슈트 장인 '송영식'의 삶을 조명한다. 아무나 시도하지 못하는 일에 뛰어들어 ‘사이먼’을 시작한 청년의 패기가 정오의 태양처럼 눈부셨다면,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계에서 평생토록 제자리를 지킨 노년의 우직함은 황혼처럼 찬란하다. 오랜 역사를 증언하는 동료들의 음성이 장인의 건재함을 견고히 지탱하며 영화는 계속된다. 한편, 단 한 명의 후계자도 남기지 않은 송영식의 생명이 다한 뒤 지난 세대의 역사로 저물어버릴 이 모든 영광을 아까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캄캄한 밤이 이어지리란 사실은 암울한 상상을 촉발하지만, 이는 사이먼의 이야기가 오직 송영식만의 고유함으로 영원히 빛나리란 뜻이기도 하다. 영화는 후자의 영원성에 기대를 걸어본다. 사이먼의 장래와 송영식의 장례가 교차할 어느 날, 과거를 기리고 현재를 아끼며 미래를 준비하는 오늘의 기록이 눈물 대신 웃음을 자아내길 염원하는 마음으로. (함윤정)

선을 갈다 Replace the Strings

 

극영화|컬러|36분|2025

 

DIRECTOR 문경의

 

서울로 이사를 준비하던 날, 현수는 옛 연인 시현에게 "만년필을 돌려달라"는 문자를 받는다. 같은 날, 기타 줄이 끊어지고, 시현에게서 받지 못했던 것을 떠올린다.

 

프로그램 노트

현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무언가 사라진 자리는 또 다른 무엇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엄마의 빈자리를 모자람 없이 채워준 할머니 덕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다. 그러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현수는 전과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대체가 아닌 잔여에 관하여. 할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할아버지의 기타가 무언의 답처럼 현수의 눈에 들어오고, 그때부터 현수는 글을 쓰기 시작한다. 어느 날 조율이 풀린 할아버지의 기타를 들고 집을 나선 그는 연인이 될 시현을 만나는데, 다만 이것은 모두 지나간 이야기다. 현수와 시현의 관계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미 끝난 상태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새 삶을 준비하기 위해 짐을 정리하던 그들은 한동안 의식하지 않았던 이별의 잔여를, 서로가 서로를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을 돌려주고 또 돌려받기 위해 재회한다. 그 시간 동안 두 인물은 제게 필요한 것을 다시금 상대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 한 몸 같던 서로를 이미 떼어낸 그들의 재결합은 이뤄지지 않는다. 줄이 끊어져도 기타는 기타고 잉크가 떨어져도 만년필은 만년필이듯, 그들은 오직 자신다운 모습을 되새기며 각자의 길을 떠날 뿐이다. 필요한 것을 오직 필요한 만큼만 담담히 주고받고 돌아서는 뒷모습이 마음을 깊이 울렸다. <선을 갈다>가 내게 남긴 것이다. (함윤정)

몽중몽 Dream within a Dream

 

극영화|컬러|22분|2025

 

DIRECTOR 권현지

 

영화를 공부하러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 감독 지망생 유 단. 출국을 앞두고 단은 푸념을 늘어놓던 엄마가 죽는 꿈을 꾼다. 엄마를 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지만, 정작 엄마를 마주하면 답답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등골이 빠졌다. 바닥을 기어다니는 엄마를 위해 단은 사라진 등골을 찾아야만 한다.

 

프로그램 노트

나는 수풀을 헤매고, 차가운 물 속을 더듬어 무언가를 찾는다. 병원 청소일을 하며 평생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온 엄마가 등골이 빠져 버려 찾을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기 때문이다. 엄마의 등골은 어디에 있을까, 빠져 버린 곳에는 무언가가 새로 자라날 수가 있긴 할까?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려는 내게 싼 곳 찾다가 힘 빼지 말고 맘에 드는 숙소를 찾으라던 엄마는,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배경으로 프랑스 영화를 찍는 내게 엎드려 기어 다가오고 결국은 업고 물을 건너게 한다. ‘죽으면 돌아다니지도 못하냐?’며 찾아온 돌아가신 아빠는 엄마를 해체해 목욕탕을 피범벅으로 만들어 놓고는 네가 원하는 것 한가지는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것은 꿈 이야기다. 이런 꿈이 불경한가? 그러나 누구도 무의식을 단죄할 수는 없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을 모티브로 했음을 오프닝 타이틀에 넌지시 표해 두고 시작했지만, 구로자와의 영화가 꿈을 형식으로 그의 예술과 역사와 세계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었다면 이 영화는 욕망과 공포로 가득한 무의식의 소리를 그 다양한 층위(layer)를 찾고 드러낸다. 그 층위들의 이미지는 다양하고 신선하고 환상적이며 끝내 깊은 물 속의 목소리를 듣는다. 공들여 만들어진 여운이 있는 영화다. (여설란)

[경쟁2]

셀프 테이프 SELF TAPE

 

극영화|컬러|30분|2025

 

DIRECTOR 박천현

 

유명 배우의 자살 소식이 들린다. 형사는 감독을 찾아가 사건에 대한 이유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프로그램 노트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영화의 거의 절반 가까운 분량이 이 한 번의 대화에 할애되어 있다. 하지만 전혀 느슨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두 배우의 연기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생생하게 부딪히며 두 사람을 찍는 카메라의 움직임 역시 적절하고 힘이 있다. 오버 숄더 샷의 권력도 타당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추궁하는 질문을 던질 때 시선 방향으로 당겨온 프레이밍도 신선하며 편집의 리듬도 흠잡을 데 없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이유는 한 여배우가 촬영 준비 중이던 시나리오의 내용대로 얼굴을 테이프로 감싸고 욕조에서 자살했기 때문이다. 한 남자는 그 시나리오를 쓴 감독으로 여배우가 마지막으로 자기 연기를 스스로 찍은 셀프 테이프를 보낸 사람이며, 한 남자는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형사. 대화가 진행되면서 두 사람은 상대에게서 죽은 여배우와 연관된 미묘한 지점들을 확인하게 되고 대화는 긴박감을 가지고 결말의 반전으로 향한다. 이야기의 미스터리한 긴장감과, 빗소리가 깔리는 조용한 사운드와 시간의 흐름을 살짝 비튼 전반부의 세련된 편집과 무엇보다 훌륭한 두 배우의 연기가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얼개를 높은 완성도로 빛나게 한다. (여설란)

벌레들 About Bugs

 

실험영화|컬러|9분|2025

 

DIRECTOR 이하람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어느 방의 문밖에 모여 각자 맡은 바의 일을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프로그램 노트

‘카프카의 변신에 영감받았음’을 진술하는 짧은 에필로그에 주목한다면 예의 단순한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영화는 카프카의 변신을 살짝 비틀어 어쩌면 카프카가 했어야 할 다른 이야기를 찾는다. 변신의 주인공인 벌레가 아니라 그를 냉담하게 에워싼 혹은 방역하는, 가족이라는 다른 벌레들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고전 스릴러 영화의 오프닝 같은 사운드와 이미지로 시작하여, 무음과 진동의 연속에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인물들이 연극적인 미장센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분명 플랑세캉스로 촬영되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짧은 컷과 이음으로 인물들의 순간 움직임을 더욱 재빠른 벌레처럼 변하게 한다. 정물처럼 정지해 있다가 이유가 생기면 사사삭 사각사각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서로와 마주 보거나 소통하지 않는 인물들. 망원렌즈로 심도를 낮추어 촬영한 빌딩 숲에 이어, 같은 규격의 상자 같은 집들과 그중 구멍처럼 작은 한 칸 네모 속으로 전진해 들어간 카메라가 구멍 속의 벌레 같은 인물들을 발견하는 오프닝의 재치가 즐겁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벌레로 대접받던 숨겨진 존재마저 빠르게 그들을 벗어나는 마지막 장면은 설득력을 확보한다. (여설란)

로봇 청소기와 강아지 Beep and Woof

 

애니메이션|컬러|13분|2025

 

DIRECTOR 조희영

 

아파트 안에서 일상처럼 움직이던 로봇 청소기, 우연히 열린 현관문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간다. 무심코 흘려보내던 도시 풍경 속, 유일하게 청소기를 바라본 길 위의 강아지와 마주친다. 처음엔 접촉을 거부하는 청소기와, 집요하게 다가가다 끝내 청소기를 구해내는 강아지. 그렇게 시작된 둘의 여행은 편의점 앞 골목부터 번화가, 다리 위의 야경, 광장의 불빛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모험은 곧 위기로 치닫는다. 건설 현장 최상부에서 맞닥뜨린 위험, 마치 최종 보스처럼 돌진하는 기계와 콘크리트. 강아지는 몸을 던져 친구를 지켜내지만, 결국 청소기는 방전되어 멈춰 선다. 끝내 함께하지 못했지만, 강아지는 멈춰 선 청소기 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따뜻한 접촉을 나눈다.

 

프로그램 노트

<로봇 청소기와 강아지>는 어떤 인공지능 프로그램도 사용하지 않고 손수 픽셀을 찍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10분 남짓한 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말 그대로 한 점 한 점 찍어내는 수고로움을 시작한 계기에 호기심이 가고, 분주한 일상에서도 그런 정성을 틈틈이 이어온 마음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영화는 아파트에 사는 한 가족의 로봇 청소기와 떠돌이 강아지라는 각기 다른 공간을 맴도는 두 존재의 만남을 그린다. 도통 접점이 없는 우리네 일상 속 미미한 존재들을 마주치게 한 상상력과 재기 발랄한 표현 기법에 당신도 금세 빠져들 것이다. 어쩌다 목적을 망각한 사물과 그를 통해 모종의 목적을 찾은 생명체가 펼치는 일탈의 레이스에서 우리의 것이라 믿었던 세상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 된다. 한편, 그러한 능청스러움과 별개로 세상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위태로워서 두 존재의 동행을 지켜보는 우리의 손엔 어느덧 땀이 맺힌다. 추격과 도주 같기도 하고, 우정과 연대 같기도 한 이들의 이야기는 과연 어떤 끝을 맞을까. 결말의 희비와 무관하게 일상이 없다면 일탈도 없다는 당연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환기하는 계기가 이토록 짧은 영화에 있단 사실이 우리를 감동하게 만든다. (함윤정)

한 번만 더 Just one more time

 

극영화|흑백|39분|2025

 

DIRECTOR 소유현

 

꼭 한번 보고 싶은 순간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상담실. 그곳에서 희윤은 대본을 쓰고, 지아는 연기를 한다.

 

 

프로그램 노트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한, 하면 안 되는데 해버린, 해야 하는 말 혹은 일들. 무엇이건 과거형으로 남겨두지 못해 지속되는 것들이 현재의 나를 이룬다. <한 번만 더>의 인물들과 우리는 그 미완의 시간을 살아가는 범속한 존재들이다. 영화에 흐르는 말과 글, 이미지들은 표면일 뿐 그 심연을 헤아리는 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겠다. 얼마 간은 꾸며내고 또 얼마간은 사실일 말들. 영화가 그렇듯이. 이를테면 지아의 발화는 종종 희윤이 쓴 대본을 읽는 건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는 것인지 그저 상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두 사람의 대화 또한 사담, 상담, 역할극의 경계를 오가고는 한다. 설명적인 숏을 배제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상담자와 내담자가 앉은 자리, 또는 발언의 주체를 바꾸면서 모호함을 의도한 결과다. 두 사람의 대화를 포착하는 가장 익숙한 방식인 오버 더 숄더 숏 대신에 얼굴과 얼굴의 클로즈업으로 연쇄되는 숏들이 자아내는 리듬도 나는 좋다고 말해야겠다. 영화는 인물의 기억과 생각, 그들이 나누는 대화들, 다시 말해 말과 이야기로 쌓아 올린 세계다. 그로 인해 평범한 상담실은 돌아올 수 없는 시간, 혹은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이 펼쳐져 시공을 초월한 공간처럼 보이고, 쓸쓸한 내면의 풍경처럼 빈 정류장과 버스, 도시의 밤이 주는 정취가 아름답다고도 말해야겠다. 스스로 설명하지 않으려는 영화를 긴 문장으로 좇는 이 아이러니도 영화를 사랑하는 법들 중의 하나일 테니까. (김지연)

[경쟁3]

유배우가 죽었다 Ruin Mr. You

 

극영화|컬러|30분|2025

 

DIRECTOR 유승원

 

저예산 독립영화 촬영 현장에서 유배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유배우의 시체를 도구 삼아 촬영을 이어갈수록 연기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억눌린 갈등과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프로그램 노트

카메라가 켜지지 않는 시간, 혹은 카메라 뒤의 시간 동안, 영화 현장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유배우가 죽었다>는 세트장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장르의 관점에서 조직한 작품이다. 촬영장 곳곳을 굼실굼실 누비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주목해 볼만한데, 이때 카메라는 공간과 인물, 사건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시선으로 기능한다. 인물들의 이동, 시선, 주고받는 대화를 따라서 원테이크로 이어내려 노력한 숏들은, 보는 이를 그 현장 안으로 끌어들여 인물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욕망의 상황에 공모자처럼 만든다. 다소간 과장을 허락한다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유배우가 죽었다>는 영화산업의 이면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빌리 와일더의 <선셋 대로>와, 폐쇄된 공간 안에서 스릴러의 긴장감을 극대화한 히치콕의 <로프>를 유사(pseudo) 아버지로 섬기는 여러 자식들 중의 하나로서 야심을 가진 작품이다. (김지연)

물질형태 The Form of Matter

 

다큐멘터리|컬러|15분|2024

 

DIRECTOR 이성욱

 

‘시락’은 공연의 음성 해설 작성을 위해 배우들과 함께 연습에 참여한다.

 

 

프로그램 노트

두 존재의 층위가 겹쳐진다. 유리 수조 안에서 대사 없이 효과음에만 의지해 퍼포먼스를 펼치는 연기자들과, 이들이 일일이 언어로 설명하여 물속 퍼포먼스에 함께 참여시키는 시각 장애인 연기자.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무 안일하다. 존재의 형태와 환경은 너무도 다양해 지금 내가 어느 층위에 존재하는 누구인지 사실 단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리가 사라지는 물속의 세상일 수도 있지만 유리창 벽 속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은 무음의 공기 수조 속에 떠다니고 있기도 하다. 눈과 이미지는 탐욕스럽다.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감각과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각 장애인을 클로즈업할 때 이 존재를 진정으로 포착하기를 갈망하며 다가간다. 이렇게 말하게 되는 이유는 이 진지하고 순수한 화자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차들의 소음 속에 들리는 파도와 벌레와 새들의 소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젖혀 귀를 기울이는 그의 말들은 과연 나의 감각은 세상을 진실되게 마주하는지 의심해 보게 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좀 더 귀를 열고 눈을 감지 말아야 할 이유”라고 그가 말할 때 세상을 활짝 연 감각으로 껴안아야 함을 느끼며 오히려 눈을 감고 싶어진다. 그때 카메라는 그의 귀를 바라보며 온갖 소리들의 세상에 집중하는 그를 촉각 한다. (여설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Closer than they appear

 

극영화|컬러|12분|2025

 

DIRECTOR 신은주

 

민지는 보기 싫은 자신을 떼어내 묻었다. 다시 가 보니 그 자리엔 무가 묻혀 있다.

 

 

프로그램 노트

사이드미러에 주로 씌어있는 안내 문구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은 영화 속 나와 무의 관계,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를 드러내는 조건으로서의 부재, 혹은 존재와 부재의 긴장 관계쯤 될 것이다. 어느 날 나는 ‘나’를 숲에다 묻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숲을 찾았을 때, 묻어버린 ‘나’의 자리에는 무가 남아있고, 그것을 옮겨 심었다가 국을 끓인다. 내레이션은 그것을 나라고도, 너라고도 칭하지만, 결국에 나는 나, 또는 무를 먹을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지시하는 무란 채소로 형상화되어 있으나 누구든 무(無)의 동음이의어로 작동한다는 것, 그것이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일을 표상한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승옥의 단편 「서울의 달빛 0장」이 나지막한 내레이션의 일부로 활용되면서 영화는 인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 혹은 정체성을 성찰하는 짤막한 에세이 필름으로 감각적인 탐구를 시도해 보려고도 한다. (김지연)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Even Now, I'm Not Sure

 

극영화|컬러|38분|2025

 

DIRECTOR 최준서

 

아직도, 9살 지아에게 젖을 주며 키우는 선아. 지아와 남편 지철을 아침에 보내고 나면 선아는 화장실에 틀어박혀 물을 튼 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선아에게 아랫집 화장실에서 물이 샌다는 소리를 듣게 되는 동시에 선아의 엄마 정희가 불현듯 나타난다. 선아는 자신이 유일하게 안심하던 화장실이라는 장소를 더는 못 쓴다는 불안감과 함께 정희와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프로그램 노트

아홉 살 딸을 키우는 선아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랑과 관심을 한없이 기울여도 모자랄 자식을 방치한 엄마의 사정에 대해. 또 술만 마시면 본인도 감당키 어려운 감정을 어린 자신에게 쏟아낸 엄마의 마음에 대해. 굳게 믿진 않았어도 일말의 기대는 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조금이나마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어 엄마가 된 선아는 깊게 팬 흉터 같은 기억과 더욱 쓰리게 대면하게 된다. 그렇게 기댈 곳 없는 마음의 대물림만은 피하고픈 그녀는 너무 많은 애를 써버린다. 폐기된 믿음의 자리에 자라난 두려움이 모종의 강박을 길러내는 바람에 선아는 건강치 못한 양육관에 칭칭 사로잡힌다. 그런 선아가 아직 모르는 것은 엄마의 사정과 마음에 대해서뿐이 아니다. 누군가 들여다봐 준 적 없는 제 마음을 스스로 살필 방도를 몰라 그녀는 욕실로 숨어들었던 어린 시절의 습관을 되풀이한다. 쏟아지는 물줄기에 어린 날의 상처도 쓸려가면 좋으련만, 적절히 소화될 기미 없는 물음들처럼 성가시게 돌아온 물줄기가 더 깊어질 곳 없는 흉터를 난폭하게 후벼 판다. 이해도, 용서도, 심지어 사랑도 서툰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이 아직 어렵기만 하다. (함윤정)

[경쟁4]

한낮의 UFO를 믿으시나요 Midday UFO

 

극영화|흑백|13분|2025

 

DIRECTOR 김원우

 

문주는 평소 선망하던 기자 재흥을 만난다. 재흥은 문주에게 대뜸 UFO를 믿는지 묻는다.

 

 

프로그램 노트

당신이 만약 아이폰을 사용하고 있다면, 초당 프레임을 60으로 설정하여 하늘을 동영상으로 찍고 그 화면을 프레임 단위로 검토해 프레임 상을 빠르게 움직이는 UFO를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누군가 말한다면 당신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기자 지망생인 당신이 해답을 구하고자 하는 선배 기자라면, 혹은 가장 친한 친구라면,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하늘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면. 처음 UFO를 촬영하자던 선배 기자는 ‘눈으로 봤는데 왜 못 믿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해 듣고 하늘을 촬영해 본 친구는 ‘믿는데 왜 못 봐?’라고 반문한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상황. 오늘날 같은 정보 과잉의 시대,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재미있고도 시의 적절한 이야기다. 그런데 처음 선배 기자는 ‘이건 벌레가 아닌가요?’라고 의심하는 주인공에게 ‘에이 여기 벌레가 어디 있어요’하며 웃는다. 이 넓은 공간에 벌레보다 UFO가 촬영될 것이 더 확실하다는 일종의 믿음. 인간의 눈은 원래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지적이 있다. ‘보았으니 사실이다’라는 확신 이전에 내가 그것을 보고 싶어 한 이유도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인물들의 첫 등장을 그림자 이미지로 처리한 오프닝 장면도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여설란)

흥얼흥얼 Heung-eol Heung-eol

 

극영화|컬러|19분|2025

 

DIRECTOR 류도현

 

축제를 앞둔 데빌 단무지는 노래 선정으로 왁자지껄하다. 각자 추구하는 노래가 다르고 오늘까지 제출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별하는 눈치를 본다. 성황리에 선정을 끝내고 그들은 학원, 야자, 입시 등 각자의 학업으로 인해 얼마 연습을 못 하게 된다. 곧 축제가 코앞인 별하는 몰래 밤에 학교로 들어가 연습하자는 의견을 낸다. 별하의 의견대로 각자의 학업을 마치고 몰래 연습하다 경비원에게 들킨다. 내쫓겨나긴 했지만, 나름대로 연습을 마친 그들은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친다. 축제가 끝나고 그들의 동아리 방을 물품 보관실로 개조한다는 소식을 들은 별하. 별하는 이를 막기 위해 부원들에게 알리지만, 그들은 순순히 이를 받아들인다. 폐부 위기를 맞닥뜨린 별하는 리더 누리에게 가보지만, 누리가 전과 다르게 이상하다.

 

프로그램 노트

펑크는 청춘의 영원한 상징인가 보다. 올해는 <린다 린다 린다>의 개봉 20주년이다. <흥얼흥얼>에는 블루하츠 대신 크라잉넛이 있다. 크라잉넛은 올해로 데뷔 30주년을 맞았다. 학원은 많지만 학원물은 드문 한국. 그래도 입시가 전부는 아니고 십 대들은 자란다. 교내 밴드 동아리로 모인 네 사람. 이런저런 사정으로 합주조차 쉽지 않은 데다 동아리실마저 비워줘야 한다. 그들에게는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력한 열의도 두각을 나타내는 재능도 없다. 그래도 그들이 무력하다거나 포기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학창 시절 한 번쯤 친구들과 겪어봄 직한 즐거운 시간의 끝, 혹은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의 시작이든 여전히 그들에게는 무엇이나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어서일 것이다. 바로 그 점이 모두가 청춘을 선망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그리고 좋아하는 마음을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지금의 흥얼거림은 그로울링, 샤우팅, 스크리밍으로 터져 나오리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안다. (김지연)

유령 Haunt

 

다큐멘터리|컬러|28분|2025

 

DIRECTOR 임지훈

 

한 사내가 사라졌다. 내가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과거에 그가 살았던 곳의 주소뿐이다. 점차 지워지고 있는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가 살았던 곳으로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사람과 집을 마주한다.

 

프로그램 노트

사내가 사라진 후, 거주 불명자의 것이 된 주민등록초본과 언젠가 그와 함께 찍은 사진만이 남았다. 흔적처럼 남은 것들은 존재에 대한 증거이자 부재를 가리키는 지표이기도 하다. <유령>은 이처럼 흔적이 품고 있는 양편의 의미를 익히 아는 이가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 초본을 지도 삼아 사내가 살던 동네를 배회하는 걸음과 이름 모를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는 몸짓에 서두름이 없는 이유는 이토록 느지막한 당도에 걸어볼 만한 기대의 크기를 연출자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고 흔적에 다가갈수록 존재는 불투명하게 감각되고, 생사에 대한 예감의 추 또한 죽음을 향해 기울어진다. 그렇게 어수룩한 생생함과 정제된 흐릿함으로 장면화된 현재가 잇따르다, 어떤 만남을 기점으로 카메라는 사라진 사내와의 접점에 성큼 다가선다. 꿈결 같던 현재 속에 과거의 사정과 미래의 약속이 모여들기 시작하는 것도 그때부터다. 결국 사내는 어떤 존재로 기록되고 또 기억될까.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부재를 경유해 또 다른 삶의 안녕을 묻는 <유령>의 화법이 산 자보다 유령을 부르는 의식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함윤정)

낯선 사람들 someday we met

 

극영화|컬러|32분|2025

 

DIRECTOR 이남영

 

부산의 오래된 원도심 중앙동, 언젠가 있었던 것들과 아직 오지 않은 것들 사이를 거니는 한 여자와 한 남자의 하루.

 

 

프로그램 노트

여자는 부산 중앙동에서 오래된 건물을 찾고 있다. 영화 로케이션을 물색하러 이곳에 온 눈치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동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옛 건물이 많은 골목으로 그녀를 안내한다. 산을 깎아 바다를 메웠다는 곳, 찾는 이가 없어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는 가게, 주인 없이 남겨진 방들. 공간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모습을 바꾸다 어느덧 쓰임을 다한 채 누군가 다시 써줄 새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편, 동행이 계속되면서 두 인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관한 이야기까지 대화의 주제로 끌어들인다. 뼈대조차 남지 않은 빈터에 선 남자는 언젠가 이곳에 있었을 누군가의 집을 떠올리며 가상의 스토리텔링을 시작한다. 여자는 남자가 세운 허구의 공간에 자신의 기억을 겹치며 이야기에 생명력을 더한다. 장소에 대한 물색과 공간에 대한 탐색은 이제 삶에 대한 호기심으로 자리를 옮겨간다. 그렇게 허구의 인물들이 상상하는 실제의 삶이, 여태껏 그들의 걸음 뒤로 배경처럼 스치던 낯선 사람들의 모습이 프레임에 전면화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성사된 신묘한 만남에서 또 한 편의 스토리텔링이 전개될 때, 우리는 오래된 건물처럼 우두커니 서서 어떤 이야기와 새로이 대면하게 될 것이다. (함윤정)

[경쟁5]

시네마 테러리스트 Cinema Terrorist

 

극영화|혼합|89분|2025

 

DIRECTOR 기모태

 

외진 마을 명성 높은 예술영화감독 상덕이 자신의 딸(홍이)과의 일상을 영화로 만들고 있는데 뜬금없이 그의 동생 종덕이 방문한다. 종덕은 다큐를 찍겠다며 카메라를 설치하고, 종덕을 잦아온 전과자 친구들은 점점 격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마주한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적 자아에 대한 거친 도발 혹은 숨 가쁜 고백. 예술로서의 영화와 영화적 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수용과 관객의 대중성, 이상의 추구와 리얼리티의 확보, 영화적 환경으로서의 평단과 영화제의 권위 등 영화의 현실과 영화적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한꺼번에 던져 보고자 하는 야심 만만한 기획. 벨라 타르 <토리노의 말>의 부녀를 옮겨 온 듯한 예술영화 감독 상덕과 그의 딸 홍이, 옛날 방식으로 불씨를 만들어 불을 피우고 이를 영상으로 찍어 다시 보며 도시 문명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운영하던 마지막 예술영화관을 폐업하게 된 상덕의 동생 종덕이 찾아와 다큐멘터리영화를 찍고 홍이를 데려가겠다며 상덕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다. 상덕의 영화를 재미없음으로 규정한 종덕의 난입과 더불어 영화는 범죄, 에로티시즘, 공포 스릴러의 장르를 넘나들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하며 상덕을 압박한다. 종덕이 아동 학대로 규정하는 삶을 절제와 수련으로 받아들이던 홍이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거친 호흡으로 질문을 던져 대면서 영화는 자유롭고 기발한 이야기로 관객을 성공적으로 끌어들인다. 평단이든 대중이든 그들의 이성이든 감각이든 영화는 결국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이야기의 문제이다. 자 다음 이야기는 무엇인가? (여설란)

[경쟁6]

일단발광 JUST BALGWANG

 

다큐멘터리|컬러|114분|2025

 

DIRECTOR 이솔빈

 

이미 수차례 멤버 교체를 겪어온 밴드 소음발광. 그런 소음발광의 멤버 동수, 기태, 그리고 보경은 작은 동네 술집에 모여, 기영의 갑작스러운 탈퇴 선언에 대한 각자의 아쉬운 마음을 나눈다. 근 몇 년간 안정적인 멤버 구성으로, 전성기라 할 만큼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으나 다시금 예기치 못한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잦은 멤버 교체에 넌더리가 난 리더 동수는 앞으로 밴드를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프로그램 노트

작은 음이 빛을 낸다. ‘소음발광’의 리더 동수는 노이즈를 내뿜으며 혼신을 불태우는 자신의 음악에 비해 소박한 의미와 심상을 담은 밴드의 이름에 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일단발광>은 그가 내린 의외의 정의 같은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의 연출자는 음악 광인들의 비범한 일상을 그럴 듯이 정돈해 밴드의 흥망성쇠를 신화화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 대신 백스테이지의 진중한 고민과 작은 오해들, 때로는 절대 작지 않은 과오까지 빠짐없이 기록하며 불협화음마저 밴드의 길을 밝혀온 빛이었음을 설득해 낸다. 미묘하지만 큰 차이를 만든 연출적 태도를 결과론적으로 상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 명의 구성원처럼 밴드와 부대끼는 카메라의 능청스러움과 그 앞에서 무람없이 내밀한 속내를 털어놓는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신비로움의 원리를 말로 다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녹록지 않은 환경과 익숙해질 때쯤 거듭되는 이별, 그럼에도 계속해서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현실까지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창작자들의 진솔한 이야기가 좀처럼 낯설지 않아 더욱 귀를 열고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다큐멘터리의 미덕은 때로 불가능이 빚어낸 감정에 의해 완성된다. (함윤정)

[경쟁7]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On a beautiful day

 

극영화|컬러|81분|2025

 

DIRECTOR 권용진

 

함께 사는 배우 진태와 성연은 같은 영화의 남, 여주인공 역에 지원하게 되고, 진태만 합격한다. 성연은 진태의 최종 오디션 연습을 위해 자신이 떨어진 역할을 다시 한번 연기하게 되고, 그런 그들에게 한 할아버지가 찾아온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적 유령들의 배회기. 외화면에 유령이 배회한다. 카메라 뒤에서 옆으로 갑자기 불쑥 난입하고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창밖을 지나 건물을 돌아와서 문소리를 낸다. 화면 안의 존재들도 유령이긴 마찬가지다. 시나리오를 연기하며 생겨난다. 대사를 교환하며 서로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사랑과 슬픔의 깊이에 도달한다. 그들의 세상은 대본의 방식대로 구축되어 12월이 10월로, 맑은 하늘은 비와 눈으로 쉽사리 변하기에 그들은 우산이 필요하다. 우산은 회상처럼 남겨진 그들 존재의 물질적 흔적이다. 연기를 통해 유령적 생명을 얻는다면 시나리오상의 문자적 존재, 대사로 호명되어 진 존재도 유령의 생명을 얻는다. 그들 세 존재는 서로의 자리를 공유하고 역할을 바꾸고 시체처럼 누워 유령으로의 생환을 준비하고 다시 호명되기를 애원한다. 그렇다면 이 속에서 진정 살아있는 존재는 카메라다. 그들과 그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차분히 탐색하고 그들이 사라진 자리, 언덕과 들판과 길 위를 다시 찾아 천천히 훑어보며 그들을 추억한다. 영화적 유령과 주체를 다시 확인하는 영화. (여설란)

 


스펙트럼 부산 - 나우

 

[비경쟁]

옹기와 장인 Village of Onggijang

 

다큐멘터리|혼합|47분|2025

 

DIRECTOR 오민욱

 

울주 외고산에는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옹기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옹기 장인이라고 부른다. 옹기를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고유한 가치를 전하는 장인들은 흙으로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불꽃의 혼이 담긴 숨결을 옹기에 불어 넣는다. 숙명처럼 다가온 흙과 불꽃의 가치는 이들에게 노력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스스로 증명하는 세상살이 그 자체이다. 흙과 불꽃으로 빚어낸 삶과 운명이 담긴 옹기는 오래된 전통을 되새기는 동시대적 존재이자, 미래세대에게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빛나는 현재이자 미래로 인식하게 하는 존재이다. 옹기와 함께 치열하게 살아온 장인이 들려주는 흙과 불꽃으로 빚어진 이야기가 시작된다.

 

프로그램 노트

유럽과 미국은 옹기를 발음 그대로 ‘Ong-gi'라 부른다. 그만큼 옹기가 한국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기법이기 때문이다. <옹기와 장인>은 울주군 외고산의 옹기마을에서 수십 년 동안 옹기를 만들어 오고 있는 옹이 장인들의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1950년대 후반 무렵부터 외고산 옹기마을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옹기 장인들과 노동자들이 군락을 이루었고, 이윽고 이곳엔 국내 최대 규모의 옹기촌이 세워지게 됐다. 인간의 손끝에서 빚어지기 시작하나 결국 불과 바람, 흙의 의지대로 만들어지는 옹기의 미학은 작중 등장하는 것처럼 근래 해외 예술가들의 관심을 이끄는 등 독자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 빠르게 변해가는 한국 사회는 이러한 옹기의 전통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옹기 장인들이 점차 현업에서 물러나고 있되, 이들의 은퇴는 단순히 한 명의 이탈을 뜻하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의 존재가 하나의 옹기 제조장과 같을 정도로 옹기 장인 개인의 역할이 큰 부담을 짊어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아직 매일매일 흙을 빚고, 불을 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은 세월을 수용하면서도 견디려 하는 자연의 이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우빈)

눈 내리는 봄날 snowy spring day

 

극영화|컬러|22분|2025

 

DIRECTOR 김종한

 

감독은 저예산으로 단편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배우 한 명을 섭외해서 영화를 찍어보지만 영화 만드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영화를 포기한다.

 

 

프로그램 노트

김종한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주로 인물이 혼자 나오며, 그 인물 또한 감독 본인이 등장한다. 즉 자신이 배우이자 감독이며, 더 나아가서는 혼자서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는 등 모든 영화 업무에 혼자서 개입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번 영화에서는 감독 역할을 맡은 임은욱이 등장한다. 영화 속 임은욱은 자신의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배우 역할인 김종한을 만난다. 둘은 영화를 찍는 하루 동안, 짧지만 많은 소통을 나눈다. 같이 영화를 찍고, 피자를 먹고, 커피도 마시며 깊은 고민들을 함께 공유한다. 평소에 찍는 방식을 벗어나 영화에 감독이라는 다른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한참 들여다보면 이것은 감독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작은 위로라고 느껴지기도 하고, 김종한의 전작들을 마치 임은욱이 찍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눈 내리는 봄날>은 그렇기 때문에 임은욱이 등장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지우더라도 영화는 계속된다. 하지만 임은욱이 감독으로 등장함으로써 우리가 보는 이 영화는 김종한 감독 그리고 관객들에게 많은 상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박천현)

홈커밍 Homecoming

 

극영화|컬러|28분|2025

 

DIRECTOR 이시오

 

유학 시절을 함께 보냈던 서훈과 함께, 오랜만에 필리핀 퀘존시티를 다시 찾은 유안은 추억이 깃든 장소를 거닐며 외면했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프로그램 노트

귓전을 때리는 도로의 소음, 아슬아슬하게 질주하는 차들이 만들어 내는 이국의 풍경은 그 나름의 질서를 갖춘 온전한 세계처럼 보인다. 그 사이로 인파에 섞여 배회하는 두 사람이 있다. 맨몸으로 길을 나선 이들은 익숙한 듯 발길 닿는 대로 유유자적 걷고 있다. 그럼에도 어딘가 두 사람은 그곳에 제대로 섞여 들어가지 못한 채 분리되어 보인다. 몇 년 전 함께 퀘존시티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가까워졌던 유안과 서훈은 오랜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서훈의 결혼식을 앞두고 결심한 나름의 우정 여행으로. 한때 이 도시에 머물며 살아가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완전한 이방인도 여행객도 아닌 중간의 어딘가에 있다. 과거의 기억과 관계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장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시절 그때 우리가 그러했던 일들에 대한 회상과 재연으로 귀결된다. 과거의 시간은 현재와 분절된 채 그 시점에 머물러있기에 아름다운 호시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유안은 그 시간을 오늘로 가져와 잇고 싶다. 영원히 기억의 자물쇠를 잠그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생한 현실로 감각하고 싶다. 그러한 유안의 내밀한 욕망은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살을 마주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형태를 드러낸다. 그 후 이어지는 유안의 발걸음은 더 이상 정처 없지 않다. (이남영)

자유사진 Free photo

 

극영화|컬러|22분|2025

 

DIRECTOR 권용진

 

정신없이 움직이는 물체들. 가도교 위의 동준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들을 실컷 비난하고, 진정한 자유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려 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리고 그가 결심을 굳혔을 때...

 

프로그램 노트

이국의 깊은 밤, 다리 위에 선 한 남자가 쉴 새 없이 달리는 차들을 향해 두서없는 불만을 쏟아낸다. 그 방향이 세상을 향한 것인지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곧 한 여자가 다가온다. 그녀는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웃으며 휴대폰을 건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너편 또 다른 다리로 달려간다. 남자는 어리둥절하다. 자신의 외침이 연기로 보였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예기치 않은 타인의 존재 때문일까. 해외 촬영이라는 낭만적인 조건 뒤에는 늘 예측 불가능한 현실이 있다. 배우와 영상통화를 할 수 있고 구글 지도로 장소를 찾아볼 수도 있지만 현지에 직접 가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공기의 온도, 얼굴의 결이 있다. 촬영일은 다가오는데 나는 아직 멀리 있다. 감독은 그 불확실함을 사뿐히 넘어 현장에서 오는 충동에 따라 영화를 만들어간다.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되 그것에 반응하는 연속, 계획되지 않은 호흡과 우연의 조합이 영화의 생동감을 만든다. <자유사진>은 제목처럼 ‘자유롭게 찍는다’는 감각 자체를 탐구한다. 빠름과 느림, 연기와 진심, 계획과 우연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감독은 우리가 놓치고 있던 영화의 자유로움을 다시 묻는다. (이남영)

우리의 계절은 흘러가고 Our Seasons Pass by

 

극영화|컬러|33분|2025

 

DIRECTOR 박준범

 

준호, 준호의 여자 친구 수영, 준호의 친구 우석은 사진동아리로 어울리며 출사를 다닌다. 준호는 어느 순간부터 수영의 마음이 우석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다. 준호는 자신은 볼 수 없었던, 수영이 우석과 있을 때 보이는 모습들을 보며 차츰 무력감이 커져만 가게 되고, 결국 결정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프로그램 노트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는 수영은 연극 <세자매> 마샤 역 오디션을 준비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수영의 곁에는 늘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남자 친구 준호가 있다. 하지만 어쩐지 요즘 수영의 관심은 항상 같이 붙어 다니는 또 다른 친구인 우석을 향해 자라난다. 사진에 재능이 있고 세심한 성격에 학업 역시 성실히 수행하는 우석. 수영은 그에게 자꾸만 향하는 시선을 어찌할 수 없다. 한편 준호는 수영의 변화를 일찍이 눈치채고 두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졸인다. 영화 <우리의 계절은 흘러가고>에서 돋보이는 것은 인물들의 시선과 움직임만으로 이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 정동을 충만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도 그 순간에는 미처 전부 깨닫지 못하고 있을 각자 마음의 속사정 말이다. 침묵을 깨고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들의 몸짓,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눈짓은 뚝심 있게 긴 호흡으로 쌓아가는 이 영화만의 리듬 안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윽고 자신의 마음에 부는 변화를 채 알아차리지 못하던 이들이 그것을 서서히 자각하고 받아들인 후 승복을 고백하는 장면들이 인상적인 여운을 남긴다. (이남영)

한퇴골 The Hill

 

다큐멘터리|컬러|30분|2025

 

DIRECTOR 김경현

 

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외삼촌이 너무 싫다. 사실 외갓집 얘기만 나오면 목이 메는 엄마도, 건강이 나빠진 이후로 더 자주 외삼촌과 싸우는 할아버지도, 남 탓도 못하고 자책하는 할머니도 모두 싫다. 그러다 유난히 더웠던 어느 추석날, 외삼촌은 키우는 염소를 보여주겠다고 나서고, 나는 끌려가듯 따라간다

 

프로그램 노트

통영시 도산면 한퇴마을. 매년 명절날이면 엄마와 아들이 이 작은 마을에 들린다. 외갓집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들이 살고 있고, 귀여운 강아지들도 함께 있다. 하지만 그 장소는 엄마와 아들에게 마냥 편안한 곳만은 아니다. 엄마는 통영의 가족들이 유일한 콤플렉스 같다고 느끼며 남들에게 소개시켜주기 어려운, 즉 감추고 싶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는 그 감추고 싶은 것들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사실 이미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추고 싶지 않은 것, 그들에게는 이미 과거형의 감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일은 아들이기에 가능한 일, 그리고 아들이자 감독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는 감추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일. 모두에게 공개되는 영화를 통해서 엄마에게 다가가는 일. 엄마와 아들은 한퇴마을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차 안에서의 둘의 대화와 엄마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는 왠지 모르게 편안해 보이며 우리는 함께 드라이브를 하듯 각자의 감정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박천현)

부력 Buoyancy

 

다큐멘터리|혼합|100분|2025

 

DIRECTOR 박배일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달려온 독립영화감독 배일. 17년 동안 관객의 외면에도 고집스레 카메라를 들던 그가 어느 날 모든 걸 내려놓고 짝꿍 남임과 불현듯 파리로 떠난다.

 

프로그램 노트

다큐멘터리 <부력>의 연출자인 박배일 감독은 반려자와 함께 프랑스 파리로 간다. 17여 년 동안 이어 온 기록 영화의 부담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고백과 함께다. 그렇게 영화의 초반은 감독 커플이 파리에서 지내는 일상으로 그려진다. 다만 파리의 일상은 감독의 의지와 반대로, 기록 영화에 대한 그의 부담을 자극하는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거리에서 심심찮게 이뤄지는 시위 가두는 감독이 겪었던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의 현장 등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에 영화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했단 감독의 속내가 서간체의 형식을 빌려 점차 더 낱낱이 밝혀지고, 파리와 한국의 이미지가 더 교묘하게 혼재되기 시작한다. 이어서 세월호 참사 당시 다른 업무로 인해 현장을 기록하지 못했던 기록 영화 감독의 죄책감, 밀양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 현장에서 시위에 함께했던 이들을 뒤로하고 적절한 앵글을 찾기 위해 먼저 빠져나왔단 자기에의 의문 등이 펼쳐진다. 전작 <어푸어푸> 무렵부터 연출자의 사적 서사를 적극적으로 영화화하며 그간의 이력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박배일 감독의 과도기적 변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이우빈)

망양중복 Forget The Ocean, When We Look At The Ocean

 

다큐멘터리|혼합|95분|2025

 

DIRECTOR 김지곤

 

녹화된 테이프를 다시 앞으로 감아서 지금, 여기를 기록한다. 사라진 것도, 사라질 것도 지금, 여기에 남아있다. 이 길에서 만났던 순간들과 지금 이 순간들이 겹쳐진다.

 

 

프로그램 노트

세월의 풍파는 언뜻 평등한 듯하나 분명 불평등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게 시간이란 말은 거짓말이다. <망양중복>이 앞선 두 문장처럼 과격하거나 단정적인 태도의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김지곤 감독이 그간 기록해 왔던 부산 중복도로 인근의 풍경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겹이, 고즈넉하게 포개어지는 작품이다. 감독이 15여 년 동안 쌓아 놓은 시간이란 접착제가 이 풍경과 서사를 긴밀히 연결한다. ‘<할매> 연작’ 등으로 중복도로 주민들과 연을 이어온 연출자의 세월이 영화의 토대로 기능하는 것이다. 감독과 친밀한 중복도로의 주민들은 옥상에 술자리를 펼치고 과거의 터를 회고하며 집단의 기억을 자연스레 공유한다. 산을 깎아 만든 마을의 길(망양로)에서 바라볼 수 있던 바다의 수평선은 어느새 고층 빌딩으로 가려져 애를 써야 그 조각이 보일 정도다. 전술했듯, 영화는 직접적인 발화로 이 불평등한 시공간의 발전을 비판하진 않는다. 대신 이 과정에서 망양로의 시점 숏으로 바다를 보고, 바다의 각도에서 망양로를 바라보는 여러 이미지를 교차한다. 마을과 바다, 개발주의에 둘러싸인 이 두 주인공은 과연 서로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망양중복>은 별다른 말 없이도 그 마음을 느끼게 만든다. (이우빈)

 

스펙트럼 부산 - 리와인드

 

[비경쟁]

계절 Season

 

극영화|컬러|28분|2009

 

DIRECTOR 배종대

 

아버지가 사라졌다. 소녀는 홀로 남았다. 소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프로그램 노트

산천초목이 생명력으로 빛나는 계절 여름이다. 소녀의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이제 혼자가 된 소녀가 염려되어 그 곁을 맴도는 소년이 있다. 어른이 아닌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실종신고를 대신 해주려고 하거나, 어두운 집안에 불을 켜주거나, 침울해지려는 소녀를 살뜰하게 챙긴다. 일상을 중심으로 사소한 말과 행동만으로 배종대는 두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고도 세밀하게 스크린에 새겨넣는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며 열매와 곡식이 영글듯이, 그 또한 한 뼘 자라는 소년소녀의 시간일 것이다. <계절>에서 우리는 슬픔과 이해, 다정함과 연민의 감각이 담백하게 그려진 아름다운 성장의 기록을 본다. (김지연)

대회전 long inside angle shot

 

극영화|컬러|16분|2012

 

DIRECTOR 김진태

 

예쁜 여친의 말이라면 별이라도 따줄 것 같은 태봉, 그런 그에게 집에서 놀고먹으며 하루 종일 멍하니 TV만 보고 있는 엄마가 한심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친에게 가방을 선물하려던 태봉은 잔액이 부족하다는 직원의 말에 당황하고 화난 여친은 떠나버린다. 다급히 집으로 돌아온 태봉은 통장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멍하니 TV를 보고 있던 엄마는 태봉을 부르며 통장을 내민다. “봉아.. 엄마 얘기 천천히 잘 들어봐라.. 얼마 전에.. 엄마.. 꿈에..”

 

프로그램 노트

맨날 텔레비전 앞에서 당구 프로그램만 보던 어머니가 아들의 통장까지 털어 당구장을 인수한다. 그러나 가게는 파리만 날리고 이제 가족 갈등의 전장이 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일방적인 아들의 비난, 원망, 잔소리가 집중포화처럼 쏟아진다.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는 문득 당구 대결을 제안한다. 이기면 가게를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과연 이 승부는 어떻게 될까? 익숙한 생활의 풍경 속에 솜씨 좋게 밀어 넣는 김진태의 농담은 2025년의 관객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웃음을 끌어낸다. 금전으로 얽힌 가족관계는 어디에나 있을 법하고, 자영업자는 늘었으나 경기 불황 속에서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긴장, 화해, 유머와 위트가 적절히 섞인 이 소동극 안에는, 김진태의 가족 코미디들이 그러하듯 은은한 인간미가 피어난다. 최근 여러 장르에서 자신의 얼굴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배우 차미경의 예전 모습도 반갑다. 또, 주요한 배역은 아니지만 은사들의 호연으로 제자들이라면 슬그머니 웃게 되는 장면도 있을 것을 예감해 본다. (김지연)

부자 Father and Son

 

다큐멘터리|컬러|18분|2014

 

DIRECTOR 윤지수

 

알츠하이머가 진행되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사신다. 항상 무뚝뚝하게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하신다. 그러한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매주 시골로 내려가는 아들.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농사일도 함께 돕는다.

 

프로그램 노트

영화의 시작에 단 한 번, 할아버지 댁에 가는 장면이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병을 진단받은 이후로 자주 이 길을 왕복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병원도 가지만 논농사, 밭농사를 거들고 안부도 살피기를 여러 번. 그런데도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나 이와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곳에 아버지와 손녀가 마음을 두고 왔기 때문일 터다. 계절의 흐름은 옷차림과 나무들, 신발, 그리고 이들 부자가 나누는 한담에 나오는 작물들의 파종 시기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홈비디오 안에서 아장아장 걷던 손주들은 취업을 앞둔 청년이 되었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얼굴에도 그만한 세월이 스며들었다. 그렇지만 건강하면 된다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바람만은 변하지 않았다.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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